Page 289 - 국제학술문화제-정신문화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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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난랑비서」의 風流에 대한 고찰 이주희
춤으로 감화시켜 쫓아낸 처용랑(處容郞) 26) , 경덕왕 때 해가 둘이 나란히 나타나 열흘 동안이나 없
어지지 아니한 흉조를 향가(鄕歌)인 도솔가(兜率歌)로 해결한 월명사(月明師) 27) , 진평왕 때 향가(鄕
歌)인 혜성가(彗星歌)를 지어 별의 변괴를 바로잡아 왜구가 물러가도록 한 융천사(融天師) 28) 의 사
례가 그러하다. 그런데 이 사례들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춤과 노래가 주로 쓰이면서 영험한 능력을
보인다는 것인데 이것은 무(巫)의 특징이기도 하다.
무당이란 고대 신교에서 제의를 주관하는 사람이었다. 대개 춤으로 신을 내리게 하고 노래로 신
을 즐겁게 했으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게 했다. 그러므로 춤과 노래
가 무격의 기원이라 할 수 있겠다. 29)
이 때의 무(巫)는 지금의 무속문화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기엔 논지
를 벗어날 우려가 있어 아래의 이능화의 글로 대체한다.
옛날에는 무당이 하늘에 제사하고 신을 섬겼으므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러므로 신라
에서는 무당이라는 말을 왕자(王者)의 호칭으로 삼았고[차차웅次次雄은 혹은 자충慈充이라고
도 하는데, 고유어로 무당을 뜻한다], 고구려에는 사무(師巫)라는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부터 마한의 천군 · 예의 무천 · 가락의 계욕 · 백제의 소도 ·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에 이르
기까지 단군 신교의 유풍(遺風)과 잔존 민속이 아닌 것이 없으며, 이것이 이른바 무축의 신사(神
事)이다. 30)
또한 흥미로운 점은 조선시대에 남자 무당을 화랑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우리말에 남자 무당을 또한 화랑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말하기를 “성종 2년(1471)에
대사헌 한치형이 상소하여 화랑이라 일컫는 남정네가 있는데, 속임수를 써서 사람의 재물을 취
하는 것이 마치 여자 무당과 같습니다”라고 했다. 31)
이수광(李睟光, 1563~1628) 32) 이나 정약용(丁若鏞, 1762~1836) 33) 은 신라시대에 화랑은 미
25) 일연, 『삼국유사』권1, 「기이」제1, 도화녀와 비형랑 참조.
26) 일연, 『삼국유사』권1, 「기이」제2, 처용랑과 망해사 참조.
27) 일연, 『삼국유사』권1, 「감통」제7, 월명사 도솔가 참조.
28) 일연, 『삼국유사』권1, 「감통」제7, 융천사의 혜성가, 진평왕대 참조.
29) 이능화, 서영대 역주, 『조선무속고』, 창비, 2008, 72~73쪽.
30) 이능화, 서영대 역주, 『조선무속고』, 창비, 2008, 71~72쪽.
31) 이능화, 서영대 역주, 『조선무속고』, 창비, 2008, 77쪽.
32) 조선중기 유학자이며, 실학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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