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4 - 국제학술문화제-정신문화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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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 분과
그렇다면 화랑도의 문화적 토대 기반이 된 풍류는 신라 건국 이래 생겨난 것인지, 그 이전부터
계승되어 온 상대(上代)사상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신라 건국 이래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
(理國之大要)’가 될 만한 이념을 내세운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 당대의 인물이 주창한 문화정
신이라면 최치원, 진흥왕, 원광법사는 그 인물을 거론했을 터이다. 이는 신라 이전, 곧 상대(上代)
의 사상으로 봄이 더 합당할 것이고 신라의 지배세력인 6촌이 이주세력임과 박혁거세의 칭호에
담긴 뜻을 감안할 때 그 기원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
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
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
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10)
『삼국사기』를 보면 ‘조선의 유민’이 경주 일대로 이주해 와서 나누어 6촌을 이루며 살았다고 하
니, 6촌은 단군조선에 뿌리를 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한 6촌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11) 고 하였는데, 이는 제천문화를 이어오던 천손사상의 반영임과
동시에 한반도를 넘어 대륙을 호령하던 단군조선이요, 북부여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박혁거세는 어리지만 왕으로 추대되었는데 이는 무리를 묶을 수 있는 명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권력이나 군사력 같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유민으로 자리 잡은 이들
이 왕으로 받들만한 혈통에 관련된 상징성이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혁거세’는 ‘불구내’ 또는 광명
이세(光明理世) 12) 로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라 했다. 이 이념은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과 뜻이 상통한다. 세상에 머물며 이치(진리)로써 뭇 생명을 변화시키고,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우리 민족 본연의 건국이념은 신라의 건국자 박혁거세에 이르러서도
그 뜻이 계승되고 있다. 이로써 풍류로 명명한 우리 고유의 문화정신은 상대(上代)의 사상으로까지
소급할 수 있다.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풍류의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13) 고 했는
10) 김부식, 『삼국사기』권1, 「신라본기」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 1년,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髙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髙耶村, 是爲辰韓六部.
11) 일연, 『삼국유사』권1, 「기이」제1, 신라 시조 혁거세왕, 按上文, 此六部之祖似皆從天而降弩禮王九年始改六部名又
賜六姓.
12) 일연, 『삼국유사』권1, 「기이」제1, 신라 시조 혁거세왕, 因名赫居世王, 蓋郷言也. 或作弗矩内王, 言光明理世也.
13) 김부식,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제4, 진흥왕 37년,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
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羣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
惡莫作, 諸善奉行, 笁乾大子之化也.” 唐令狐澄新羅國記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
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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