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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 분과
박은식과 정인보, 안재홍 등 후기 민족주의사학자들도 상고시대 우리나라의 문화와 제도가 중
국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하였지만, 이러한 주장을 가장 뚜렷하게 체계화한 인물이 단재이다. 단재
는 상고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중국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18) 단군ㆍ부여족
이 중국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경영하였으며 고구려가 대 중국 투쟁에서 승리한 것과 함께 우리 민
족의 중국에 대한 투쟁적인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단군ㆍ부여족의 ‘지나식민론支那植民論’을 강
조한 단재는 백제의 해외경략설海外經略設을 주장하였다. 19)
또한 한사군에 대한 인식도 확고하다. 일제 관학자들은 한국사의 타율성론을 주장하는 구성요
소로 한강 북쪽에 한漢의 직할 통치지역인 한사군이 존재하고 있을 때, 한강 남쪽에서는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있어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군현의 반도 내 존재설’은 한국의
자주성을 고대사에서부터 부정하려는 것으로 단재는 용납하지 않았다. 이를 용납하는 것은 멀리
는 사대주의사관을 전승하는 것이고, 가까이는 침략적인 식민주의 사관에 동조하는 꼴이 되는 것
이다. 따라서 자주적인 입장에 서서 한군현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전근대적인 사대주의사관과 근
대의 탈을 쓰고 침략을 정당화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을 부수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절박한 과제로 인식하였다. 단재의 이러한 주장은 한사군의 위치 문제에 그치지 않고,
‘부여ㆍ고구려 중심의 한국고대사 체계화’로 이어졌다. 종래 사학사에서는 단군→기자→위만→
사군이부四郡二府→삼국→통일신라로 계승되거나 혹은 단군→기자→삼한→삼국→통일신라로
계승된다는 두 계통의 흐름을 모두 거부하고 단군의 정통이 부여ㆍ고구려로 계승되는 것으로 체계
화시켰다. 그리고 신라 김춘추의 대판공략大版攻略과 백제의 일본 진출 등 조선의 해외공략설을
내세워 식민지사관의 한국사 침식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역사가들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20) 애국
ㆍ자유ㆍ독립 등의 용어를 기피하고, 노예사상을 고취하는 당시 학부와 교육계 인사들의 식민지
적 교육방침에 대하여도 맹렬히 공격하고, 학부가 애국심 대신 망국심, 노예사상을 조장하는 매국
적 집단라고 비판을 가했다. 21)
단재의 상고사 인식은 민족주의적 사학에 근거한다. 고려 말에 수용되었던 성리학적 사관이 조
선 중엽의 당쟁과 실학의 전래로 역사, 지리, 사회, 경제제도에 대한 연구와 중세사회에 대한 비판
18) 단재는 회수淮水ㆍ양자강揚子江 유역에서 활약한 조선족의 서언왕의 위업을 예로 들었다. 중국 측 장화張華의 『박
물지博物志』의 기록을 근거로 단군 1330년경에 황금알에서 태어나 활을 잘 쏘았던 서언왕은 서국徐國, 회국淮國지방
의 조선민을 영도하며 대제국을 건설하고 주周나라의 목왕穆王으로부터 땅을 할양받아 주변의 36제후국으로부터 조
공을 받았다는 것이다. 단재는 묻혀있던 서언왕 관계 자료를 민족주의적인 혜안으로 찾아내고 그것을 조선 부여족의
대 중국 투쟁이라는 민족사적인 쟁점으로 가장 먼저 인식하였다.
19) 백제의 해외경략은 중국의 『송서宋書』, 『양서梁書』 등의 자료에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치윤韓致奫과 『해
동역사海東繹史』를 완성한 한진서韓鎭書에 이어 『양서』, 『송서』 및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근거하여, 백제가 근구수왕
近仇首王 때에 바다를 건너 중국대륙을 경략하여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요서와 북경을 빼앗고 요서ㆍ진평 2군을 설치
하였고, 산동지방과 동진東晉이 소유한 강소ㆍ절강과 월주越州 부근, 요수 이서의 지금의 금주錦州ㆍ의주義州ㆍ애혼
愛琿 등지가 모두 백제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20) 申采浩, 『愛國三字를 他視하는 교육자여」, 丹齋 신채호 全集, 別集』 (서울: 형설설출판사, 1982), 123〜124쪽: 『國
家를 減망케ᅵ하는 學部, 丹齋 신채호 全集, 별집』 (서울: 형설출판사, 1982), l24〜128쪽.
21) 申采浩, 『讀史新論, 丹齋 申采浩全集 上卷』 (서울: 형설출판사, 1982), 481~4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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