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8 - 국제학술문화제-정신문화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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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 분과
부각되었던 단군에 대한 관심은 조선 초기부터 쇠퇴해 갔다. 대한제국 시기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단군과 민족주의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국책사업으로 전래의 문물제도를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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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증보문헌비고 편찬이 큰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서양
의 기독교 사상 유입과 일본의 침략에 따른 신도神道의 침투로 거의 소멸하였다. 일본의 종교적,
사상적 침투와 한국의 역사서 수 십 만권을 압수해 불태워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민족정신 말살은 단군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한민족의 국조로서 단군에 대한 연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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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을 통해 단군과 국학의 부활을 가져오게 되었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단군의 실재를 강조하면서, 한민족의 역사 속에 내재한 민족정신을 발굴
하고자 노력하였다. 조선의 ‘혼’과 ‘정신’, ‘얼’, ‘심心’과 같은 것이다. 단재도 단군의 역사성과 국
사를 부각시켰다. 독사신론讀史新論 에서 “우리 민족은 단군의 후손이며, 단군시대가 실재한
다.”고 주장하였다. 국사는 민족의 소장성세를 상세히 기록해야 마땅하지만, 과거의 역사서는 왕
가 중심의 역사이고, 근대의 국사교과서도 우리 민족을 다른 민족과 분명하게 구분하여 밝혀내지
못하였다고 비판하면서 단군을 민족사의 출발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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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위당 정인보는 조선의 얼과 함께 홍익인간의 이념에 주목하였다. 식민사학자들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보고,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조선의 역사를 「5천 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가 해방 이후 『조선사연구』란 제목으로 발간하였다. 위당은 『5천 년간 조선
의 얼』을 통해 조선역사 연구의 근본을 '5천년 지켜온 얼'에서 찾았다. 조선역사가 '한민족의 얼의
역사'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국학國學'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고, 단군신화를 부정하는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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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육당 최남선도 1926년 동아일보에 기고한 '단군께의 표성表誠 -조선심朝鮮心을 구현하라'라는
사설에서 “단군사상, 홍익사상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으로 중요한 가치이면서 동시에 인류 최고의
공리에 가깝다. 앞으로 우리 한민족의 철학이 인류가 당면한 전 지구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열
쇠."라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는 그가 조선 국토의 개척자, 조선 문화의 창조자, 조선 생활의 건설
자이며, 혈연상으로는 그가 조선민족의 도조상都祖上이고, 조선 권속의 대종조大宗祖이다. 신앙
상으로는 그가 조선 정신의 인격자, 조선 이상의 최고조, 조선 원리의 총괄점이다. 조선의 일체를
한 마디로 말하면 단군 사상·단군 조선 그 자체이다."라고 하였다. 10)
6) 증보문헌비고 는 대한제국 이후 국가 제도가 크게 바뀌어 이를 반영하기 위해 1770년 동국문헌비고 와 1782년
증보동국문헌비고 를 토대로 1903년(광무 7년) 홍문관 안에 문헌비고 찬집청을 두고 증보작업에 착수하여 1907년
(융희 원년) 12월 『증보문헌비고』을 완료하고, 1908년(융희 2년) 50책으로 인쇄했다. ‘5천년 한국’의 전통문화와 제
도, 의례, 법제 등을 종합적으로 수록한 일종의 ‘한국전통문화대백과사전’이다.
7) 이민원, 「한국사상(韓國思想) 사학(史學): 근대 학설사 속의 “단군민족주의”」, 『韓國思想과 文化 第72輯-』, (2014),
242~243쪽.
8) 申采浩, (改訂版) 丹齋申采浩全集 上 (서울: 丹齋申采浩先生 紀念事業會, 1977), 471~478쪽.
9) 鄭寅普, 朝鮮史硏究 上 薝園鄭寅普全集 3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3), 33쪽.
10) 최남선, 『근대문명문화론』 (서울: 경인문화사, 2013), 203~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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