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국제학술문화제-정신문화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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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 분과
고 계주는 곧 청구이며, 청구는 지금의 요동에 가깝다는 설을 인용하였다. 52) 이어서 요동은 예부
터 이름난 선지(仙地)로서 도선사상이 발원(發源)하기에 적당한 토양을 갖추었음을 『성경통지(盛
京通志)』를 인용하여 강조하였다. 53)
황제가 선인 광성자에게 물었다고 하는 ‘지도지정(至道之精)’은 무엇이었을까. 이능화는 도서
(道書)에 이른바 “황제가 광성자에게 『음부경(陰符經)』을 물었다”고 한 대목을 인용하여, 우리나라
가 도교의 원류임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54) 『도서』에 기록된 내용은 『장자』에 나온 내용을 부풀린
듯한 감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황제가 청구 지방에 왔다면 청구국 사람들의
유박한 성품을 소홀히 보았을 리 없다고 본다. 그가 물었던 도 역시 ‘유박사상(柔樸思想)’에서 유래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보아 황제가 청구국에 다녀간 이후 이 유박사상이 중원(中原)으로 파
급되고, 이어 노자에게로 계승되어 노자사상의 핵심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상에서 논한 바와 같이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이른바 풍류도에 포함(包含)되어 있다는 도선
적 요소는 문자치레가 아니오,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역사적 사실이란 바
로 『산해경』의 ‘청구국(靑丘國), 유유박민(有柔樸民)’이라고 한 데 근거를 두고 연역(演繹)되었을
것이니, 최치원이 도선사상의 기원을 우리 민족에게서 찾으려 했음이 분명하다.
같은 맥락에서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이종휘(李鍾徽: 1731~1786)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음미할 필
요가 있다.
대개 진한(辰韓)의 구속(舊俗)을 보면 스스로 외루(畏壘)나 화서(華胥)와 같은 이상국가의 경지
에 올랐는데도 스스로 알지 못하였다. 8, 9백 년이 되도록 이 상태가 이어졌다. 노담(老聃)과 장
주(莊周)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하더라도 진실로 거기에 더 보탤 것이 없을 정도였다. ⋯⋯ 유·
불·도 삼교가 중국에서 행해진 이후로 유교는 기자(箕子) 때에 이미 우리나라에서 행해졌으며,
불교 역시 위진(魏晉) 무렵에 들어왔다. 행해지지 않은 것은 노자의 도뿐이었다. 그러나 노자의
도를 실행한다는 명색(名色)은 없었지만, 기실 나라를 다스리면서 실행에 옮겨졌다. 신라가 그
정수를 얻은 것은 대개 배우지 않고도 그것에 능하였던 것이다. 55)
노장사상이 우리나라에 전래, 수용되기 이전부터 신라에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같은 사
상적 맥락이 연면히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이는 최치원이 「난랑비서」에서 밝혔던 ‘포함삼교설’을
적극 뒷받침하려는 의도로 짐작된다.
52) 『지봉유설』 권2, 지리부(地理部), 〈山〉 “按韻書曰: 「禹迹之內, 有三崆峒, 黃帝問道處, 在汝州, 杜詩崆峒小麥熟, 在臨
洮, 又其一在安定」云, 而薊州之崆峒山, 不與焉. 按陳子昻詩曰: 「北登薊丘望, 求古軒轅臺, 尙想廣成子, 遺迹白雲隈.」 子
昂豈無所考而云哉. 黃帝都涿鹿, 涿鹿今幽州. 幽州去薊門近, 則子昂之說似是.”
53) 이능화, 『조선도교사』, 47-48쪽 참조.
54) 이능화, 위의 책, 46-47쪽 참조.
55) 『수산집(修山集)』 권6, 1b-2b, 「新羅論(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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