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국제학술문화제-정신문화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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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 최치원 「난랑비서(鸞郎碑序)」에 대한 검증 최영성
있다”라 하고, 신라 경문왕이 국선(國仙)으로 현풍(玄風)을 떨쳤다 34) 고 말한 것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선’은 ‘선(僊)’으로서 우리 고유의 선풍(仙風)을 말하며, 현풍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
해할 수 있다.
최치원은 “계림 땅은 오산(鰲山)의 곁에 있다. 예부터 선(仙)과 유(儒)에 특기한 이들이 많았다”고
하였다. ‘오산’은 『열자』 「탕문(湯問)」 편에 이른바, 큰 자라 다섯 마리가 떠받치고 있다는 전설상
의 선산(仙山)으로 발해(渤海) 동쪽에 있다고 한다. 최치원이 계림의 ‘오산’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
아가 신성시하는 일면까지 보인 것은 그가 고유사상의 주맥을 선풍으로 보려했고 또 우리나라가
선풍의 연원이 됨을 은근히 드러내려는 의도라 하겠다. 사실 중국 고대에는 신선설이 없었다. 유가
의 경전은 물론 『노자』 같은 도가서에도 보이지 않는다. 『장자』에 가서야 ‘선인’이니 ‘신인(神人)’
이니 하는 말이 등장한다. 신선사상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하여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말이 설득력
이 없지 않다.
최치원은 선풍은 물론 도가사상의 연원까지도 우리나라에 연결시키려 했던 것 같다. 그는 「난랑
비서」에서, 풍류도에 유·불·도 삼교사상의 요소가 본래부터 ‘포함(包含)’되어 있다고 하면서, 도선
적 요소로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무위의 태도로써 모든 일을 처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를 들었다. 이 열 글자는 『노자』 제2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풍류도에 ‘무위(無爲)의 태
도’와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요소가 있다고 한 증언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있는 것일
까. 이것은 「지증대사비명」에 서술된 ‘월지궁에서의 심문답(心門答)’ 대목을 인용하여 이미 언급
한 바 있다.
도가사상에 대한 최치원의 이해는 『사산비명』 등 그의 저술 속 수많은 사상적 편린들을 통해 엿
볼 수 있다. 다만 도가의 사상적 핵심을 무엇으로 파악했느냐 하는 점은 쉽게 포착하기가 어렵다.
물론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네 글자로 귀결될 터이지만, 이 ‘무위자연’을 설명하기 위해 구체
적으로 어떠한 개념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하였는지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많지 않은 언급 가운
데 얼른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진감선사비문」에서 ‘성불산박(性不散樸)’ 운운한 대목이다.
선사는 천성이 ‘박실(樸實)’함을 흩트리지 않았으며, 말은 기심(機心)에서 나오지 않았다. 35)
도가사상의 핵심을 ‘박실’로 파악했음을 엿볼 수 있다. ‘언불유기(言不由機)’ 역시 도가의 무위자
연 사상을 밑바탕에 깐 표현 36) 으로서 중요한 것이지만, ‘성불산박’이란 표현은 더 중요하다. 사람
의 본성을 ‘박(樸)’으로 보고, 그것을 흐트리지 않는 인간상을 그린 것이니, 『노자』에 이른바 ‘현소
포박(見素抱樸)’이니 ‘무명지박(無名之樸)’ 37) 이니 하는 박실자연(樸實自然)의 사상을 잘 드러낸 것
34) 『역주 최치원전집』 1, 203쪽, 「대숭복사비명」 “先大王, 虹渚騰輝, 鰲岑降跡. 始馳名於玉鹿, 別振玄風.”
35) 『역주 최치원전집』 1, 163쪽. 「진감선사비명」 “禪師性不散樸, 言不由機.”
36) ‘언불유기(言不由機)’에서의 ‘機’는 『장자』 「천지(天地)」 편에서 말하는 기심(機心)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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