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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 최치원 「난랑비서(鸞郎碑序)」에 대한 검증 최영성
‘유박(柔樸)’하다고 한 것 이외에도 ‘유순(柔順)’ 47) 또는 ‘유근(柔謹)’ 48) 하다고 한 기록도 있다. 여
기서 한결같이 ‘유(柔)’를 말한 점이 주목된다. ‘유’란 본디 나무를 구부릴 수도 있고 펼 수도 있다
〔木曲直〕’는 의미다. 여기서는 사람을 다스리기 쉬운 바탕을 가리킨다. 『후한서』에서 “도로써 다스
리기가 쉽다〔易以道御〕”고 한 말은 이를 가리킨다. 동이족은 천성이 유순하였으므로 법령이 사실
상 필요 없었다. 『노자』 제57장에 이른바 “법령이 정비될 수록 도적이 많아진다”고 한 바로 그대로
였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8조에 불과한 금법(禁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것은 고조선 사람
들의 유박한 성품에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유박’은 도가에서 ‘유약하고 박실한 덕’을 강조하는 것과 상통한다. 『노자』에는 ‘유
(柔)’와 관련된 내용이 11회 보인다. 제10장에서 ‘전기치유(專氣致柔)’라고 한 것을 비롯하여, 제
15장의 ‘돈혜기약박(敦兮其若樸)’, 제52장의 ‘수유왈강(守柔曰强)’, 제78장의 ‘유지승강(柔之勝
剛)’ 등에서 ‘부드러움을 지킬 것〔守柔〕’을 강조하였다. ‘겸하유약(謙下柔弱)’은 노자가 자신의 이
상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중요시했던 것이다.
도선가에서는 노자의 사상을 위로 황제(黃帝)에게 연결시키고, 황제와 노자의 사상을 하나로 묶
어 ‘황로무위(黃老無爲)의 사상’이라거나 ‘황로지학(黃老之學)’이라고 일컬었다. 도가는 연원상으
로 노장학(老莊學)이기에 앞서 ‘황로학’이라는 것이다. 도가에서는 유가에서 가장 숭배하는 요제
(堯帝)를 초월한 사람으로 황제를 추존하고 그의 가르침을 『황제경(黃帝經)』과 『도경(道經)』에 담
아 편찬하였다. 또 공자에 필적하는 사람으로 노자를 신성시하여 『도덕경』을 장기간에 걸쳐 누차
추고(推敲)하였다. 기원전 3세기 후반에는 황로학이 성립하여 한대(漢代) 이후까지 성행하였다. 49)
후세에 허다한 가탁(假託)으로 말미암아 황로학 자체가 의심을 받았고, 또 황제와 노자의 사상적
연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와 노자 사이의 연관성을 다수가 부정하
였다면, 도선사상이 중국 사상의 양대 조류로 존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장자』에 보면, 일찍이 황제가 공동산(崆峒山)에 있던 광성자(廣成子)를 찾아가 지도(至道)를 물
었다고 한다. 50)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황제가 동쪽으로 청구 지방에 왔다.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선생(紫府先生)을 만나 『삼황
내문(三皇內文)』을 얻어서 만신(萬神)의 이름을 캐묻고는 불렀다. 51)
황제가 청구 지방의 공동산에 가서 선인에게 도를 물었다는 내용이다. 공동산의 위치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능화는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봉유설』에서, 공동산은 계주(薊州)에 있
47)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 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
48)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論曰: 東夷通以柔謹爲風, 異乎三方者也.”
49) 金谷治(외), 『중국사상사』, 조성을(역), 이론과 실천, 1986, 82쪽.
50) 『장자(莊子)』, 「재유(在宥)」 “黃帝立爲天子十九年, 令行天下. 聞廣成子在於空同(崆峒)之上, 故往見之. 曰: 「我聞吾
子, 達於至道, 敢問至道之精. 吾欲取天下之精, 以佐五穀, 以養民人.」”
51) 『포박자(抱朴子)』, 내편 권18, 「지진(地眞)」 “昔黃帝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以劾召萬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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