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1 - 국제학술문화제-정신문화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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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사암각화에 반영된 공동체 의식 박선식
안을 순행하며 적임자를 찾았던 데 따른 기록의 단편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내용은 달리 헤아려본다면
당시 지도자(단군 등)가 공동체 내부의 문제의 해결에 적
극적이었고,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느끼게 한다고
이해된다.
한편 동아시아의 오래된 문헌자료인 『書經』의 「禹貢」부
분을 보면, 현대 한국인의 선조들이 구현했던 해양적 활동
의 일면을 짐작하게 된다. 곧 하우씨의 시기에 그들 하우
씨 영역 안으로 물자가 조달되던 상황을 마치 조공이라도
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다만 그 기록내
용에 ‘도이피복’ 항목은 너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익히 알
려진 『관자』의 이른바 ‘發朝鮮’의 정체성을 해명하는 데
더없는 관련성을 느끼게 하는 까닭이다. 곧 『書經』의 「禹
貢」부분에서 島夷라고 하는 세력이 바로 가죽으로 옷을 입
었던 사람들이고, 그들이 바닷가의 사람들로 가죽옷을 하
우씨 영역 안으로 가지고 들어섰고 팔았다는 내용 때문이
다. 그 같은 서경의 기록내용은 발조선이 무늬가 있는 가
죽(文皮, 곧 아롱범 따위의 가죽-필자 주)을 서기전 7세기
를 전후하여 중국측에 판매한 점과 정확하게 상통한다. 따
라서 이른바 고조선으로 지칭되던 사람들이 이미 서기전
23세기경인 하우씨의 시기에 중국측에 의해 ‘도이’라는
천박한 표현으로 지칭되고 있었고, 그들 도이들이 연해안
이동로를 활용한 가죽 제품의 상행위를 추진했음을 알게
한다. 다시 말해 현대 한국인의 선조들인 옛 조선인들은
거친 수렵활동으로 가죽을 얻었고, 힘들게 얻은 그 가죽을
정성스럽게 손질하여 다시 하우씨 세력에게 항해운송로
를 거쳐 판매하였던 셈이다. 실로 옛 조선인들의 적극적이
며 역동적인 활동상을 고스란히 읽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그림 8 『孤村先生文集』(乾)에 보이는
없다. 짐작컨대 도이로 지칭된 수렵문화인들은 그들의 우
단군의 남해 순회기사 부분
월한 수렵기술을 바탕으로 숱한 짐승들을 포획하고 그 짐
승의 가죽을 생산하여 전체 공동체의 구성원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갈 물자의 확보를 위해 그 가죽
산물을 교역을 통해 확보하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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