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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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1064년 문종때 거란의 고노와 함께 흑수말갈의 포기 등 8명이 귀순한다. 하지만 1066년 거란이
국호를 ‘대요’로 하고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말갈의 기록이 사라진다.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
망하고 나서 발해에 복속되었던 여러 말갈들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대체로 여진족에 흡수되거
나 발해유민들과 함께 만주와 한반도 일대로 뿔뿔이 흩어지는 과정 속에서 고려로 귀순하게 된 것
이다. 그리고 흑수말갈이 존재했던 고려의 동북쪽에는 동여진, 서여진, 동서여진, 동북여진, 북여
진 등으로 불리워지는 신진세력들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흑수말갈은 상당한 기간동안 그 존재를
유지하지만 점차적으로 동여진, 동북여진으로 대체가 된다. 고려에서도 말갈이 곧 여진이라는 인
식을 갖고 있었다. 1117년 예종때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공격을 받자 압록강 일대의 두 개의 성을
버리고 도망갔고, 그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족이 고려에게 두 개의 성을 바쳤는데, ㈑-1의 기록과
같이 고려에서는 선비족이 버리고 도망간 두 개의 성을 말갈족이 바쳤다라고 되어 있다. 즉 거란은
선비족이고, 여진은 말갈족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사회에서는 말갈을 같은 숙신 계통으로 인식하면서 고려와의 친연성을 강조하였다. 즉 전
대의 말갈처럼 고려를 대했고, 이익의 『성호사설』「천지문」에 보면,
㈑-2. “윤관이 9성을 설치할 때에 여진의 요불과 사현이 우리나라에 와서 옛적에 우리의 태조
인 영가가 말하기를,‘우리의 선조는 귀국에서 나왔다.’고 했으니, 그 자손의 대에 와서 귀
국으로 귀속하는 것이 당연하며 또 지금의 태사인 오아속도 귀국을‘부모의 나라’라고 하
였다고 했다.” 48)
이러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나온다. 왕과 신하들의 대화 속에서 당대의 역사인식을 엿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여진을 말갈로 인식하고, 그 여진하고는 생활터전을 함께하면서 때로는 군사
력으로 강제로 복속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빼앗은 9성을 돌려주고 자생할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했다.
이렇게 자생해서 세력을 키워 금나라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금사』「외국열전」‘고려전’에 보면
㈑-3. “당나라 초엽에는 말갈이 속말ㆍ흑수 양부가 있었는데, 모두 고구려에 신속되었다. 당나
라가 고구려를 멸하자 속말이 동모산을 차지하고 점점 강대해져 발해라 부르고 성을 대씨
라 하였는데 문물과 예악이 있었다. 당나라 말엽에 이르러 발해는 차츰 쇠퇴해져 이 뒤로
는 다시 알려지지 않았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정벌하자 발해는 금나라에 귀부하였는데,
대개 말갈의 후예들이다.” 49)
48)『星湖僿說』 第2卷,「天地門」‘女眞’ 참조.
49)『金史』卷135「外國列傳」第73,
“唐初, 靺鞨有粟末·黑水兩部, 皆臣屬于高麗. 唐滅高麗, 粟末保東牟山 漸大, 號渤海, 姓大氏,
有文物禮樂. 至唐末稍衰, 自後不復有聞. 金伐遼, 渤海來歸, 蓋其遺裔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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