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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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과 여러 북방민족들 간의 관계 정립이 동북아시아 고대 역사 인식 체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민성욱
『몽골비사』의 시대적 배경은 ‘칭기스칸’을 중심으로 그 시조인 몽골사람들의 조상 부르테치노
(잿빛 푸른이리)로부터 칭기스칸과 그의 뒤를 이은 셋째 아들 우구데이와 그 형제들, 세계를 향하
여 대정복전을 펼친 장손 바토와 그 사촌들에 이르기까지, 그들 몽골 사람들이 살던 세상이 그 배경
이 된다. 동아시아만 국한해서 본다면 그들이 키타드 44) , 즉 여진의 금나라를 이용하여 원수인 타
타르인들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타타르인들을 정벌한 후에는 칭키스 카한은 금 정벌에 앞서 키타
드 사람들의 알탄 카안(=금국황제)을 귀부시켜 많은 피륙을 취하고, 카신 사람들의 보르칸을 귀부
시켜 많은 낙타를 취하였다. 주르체드(여진), 솔랑가스 45) 에 원정한 잘라이르타이 전통사 후속부
대로 예수데르 전통사를 원정시켰다. 여기서 주르체드란 고려의 북쪽이나 동북쪽에 존재하고 있
었던 동여진, 서여진, 동서여진, 동북여진, 북여진을 말하는데, 이들 여진들은 발해 멸망 후 발해말
갈 및 흑수말갈들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여진족으로 편입되거나 고려로 귀순하거나 계속 만주
와 연해주 일대에 남아 있었다.
말갈과 몽골의 직접적인 관계기록은 없다. 하지만 말갈의 후대라고 일컬어지는 여진과는 많은
관계기록이 남아 있다. 칭기스칸의 후예들과 아골타의 후예들이 만나 결국 몽골이 ‘원’을 세우면
서 몽골의 승리로 끝난다. 몽골과 말갈족의 후대라고 일컬어지는 여진은 친연적인 관계를 유지한
다. ‘원’이 ‘명’에게 멸망하자 원나라 유민들과 여진족들은 ‘명’이 만주까지 그 세력이 미치지 못하
자 서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생능력을 키우게 된다. 이렇게 자생능력을 갖게 된 여진족은 ‘누
르하치’가 다시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청’제국을 세우게 된다.
7. 말갈과 여진의 관계
고려시대 때 흑수말갈에서 여진으로 점차적으로 흡수 및 통합되어 간다. 『고려사』에도 금제국
이 건국된 이후부터는 말갈관련 기록이 안 나오고 여진 기록만 나 온다. ‘금’을 세운 여진족, 즉 금
대 여진사회는 기존에는 열등한 사회로 취급해 왔다. 하지만 북만주 지역에서 발흥하여 생ㆍ숙여
진사회를 통일하고 나아가 ‘요’와 ‘북송’을 멸망시킴으로써 고려ㆍ남송과 국경을 접할 수 있었던
대국을 형성한 여진인들의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전대인 말갈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말갈이 바로 고구려를 구성하고,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하여 ‘해동성국’이라고
불리어지는 발해를 건국한 주체였다. 비록 거란족에 의해 멸망했지만 말갈족의 기상은 그대로 여
진족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발해 멸망 후 흑수말갈은 발해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형태
44) 『몽골비사』에서는 kitad는 거란의 遼가 아니라 여진이 세운 金이다. Kitad irgen은 金朝지배 하에 중국 및 그 판도
에 거주하는 사람. Altan-qahan과 Altan-qan은 金朝의 황제다.
45) 주르체드(여진)는 金朝의 중추세력이 아니라 고려 장성 북쪽의 여진인들이고, 솔랑가스는 고려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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