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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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과 여러 북방민족들 간의 관계 정립이 동북아시아 고대 역사 인식 체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민성욱
되어 신라를 괴롭히기도 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문왕 때는 신라의 중앙군사조직인 구서
당 중 제6서당인 ‘흑금서당’의 일원이 되어 신라왕의 친위부대 역할을 하였다. 돌궐이 거란을 요서
지역에서 몰아낸 이후에는 송화강 유역에 있던 물길 집단이 요서지역으로 이주해와 요서말갈(속
말말갈, 백산말갈)로 친돌궐 또는 친고구려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옥저 지역에는 읍루가 이웃
하고 있었는데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초토화되고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읍루가 내려와서 정
착하게 되었고 이후에 백산말갈이 되어 속말말갈과 함께 고구려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고구려 멸
망 후에는 고구려말갈에서 발해말갈로 변신하여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 건국에 주도적인 역
할을 하였으며, 발해 건국 후에는 말갈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발해의 기층민이 되어 발해 역사
와 문화의 발전을 이끌었다. 발해는 동아시아 역사의 변방이었던 극동 지역을 역사의 중심으로 끌
어 올려 ‘해동성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발해가 주변의 제 종족들을 통합시
키고 힘을 합쳤기 때문이며, 춥고 황량한 지역에서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낸 노하우는 훗날 거란이
나 여진이 각각 요와 금 제국을 일으키는 데 큰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결국 말갈의 후예인 여진족
은 후금에 이어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갖게 된 청 제국을 탄생시켰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말갈로서 고수 및 고당 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할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했던 말갈은 전쟁 후 당으로부터 참혹한 학살이라는 보복을 당하기도 하였고 발해 건국 후에는 5
경 15부 62주 중 막힐부의 구성원이 되었지만 거란족에 의해 발해가 멸망당하면서 일부는 고려,
요, 돌궐, 당, 여진 등으로 흩어졌지만 또 다른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훈족(흉노), 아바르족(유
연), 투르크족(돌궐) 등의 전철을 밟아 서유럽 지역에 강력한 인상을 남겼으며, 지금의 헝가리의
건국 주체가 되었다.
2012년 학위논문 ‘한국사에서 말갈인식에 관한 연구’를 발표한 후 10년이 지났다. 우리 고대사
의 기원이 북방사에 있음을 알고 북방민족 중 연구 대상을 물색하다가 가장 눈에 띄는, 하지만 아주
요상한 종족인 말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말갈은 고구려의 구성원이었고, 발해의 기층민으로 속
말말갈 출신 고구려인, 대조영과 함께 발해 건국의 주된 세력이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만주지역에
계속 남아 동북아시아의 역사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금제국과 청제국에 이르러 중원을 지배
하게 되었고,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의 근거가 발해
사는 중국의 소수민족인 말갈족이 세운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이고, 발해가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
승했기 때문에 고구려사 또한 중국의 역사이며, 고구려가 부여에서 비롯되었고, 단군조선을 계승
했기 때문에 단군조선과 부여도 중국사라는 논리의 근거가 말갈에서 비롯되었다. 말갈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지킬 수 있는 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갈 연구를 하면서 그 실체에 다가설 수 있었고 말갈이 한민족의 한 구성원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기도 했다. 남겨진 사료가 부족하지만 실체가 있는 집단이라면 주거지를 중심으로 유적
및 유물을 많이 남겨 놓았을 것이고, 그것을 토대로 말갈관계사 연구를 통해 말갈의 실체를 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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