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5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P. 45

말갈과 여러 북방민족들 간의 관계 정립이 동북아시아 고대 역사 인식 체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민성욱



                         뢰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포주를 의주 방어사로 고치고 압록강을 경계로 삼아 관방을

                         설치하였다. 갑오일에 백관이 표문을 올려 축하하였다. 그 표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압
                         록강 일대는 신라의 옛 지역으로서 조상 때부터 우리나라의 관방으로 되어 있었는데 중

                         엽의 쇠퇴로 인하여 요나라에 침략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만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 귀신도 부끄러워하였던 것입니다. 계속하여 근래에 양적(요와 금)의 분

                         쟁으로 인하여 우리 두 성의 종속 문제를 염려하였더니 말갈족이 성을 바치겠다고 한 것
                         은 하늘의 의사를 좇음이요 선비족이 가만히 도망한 것도 사람이 시킨 일은 아닙니다. 우

                         리의 일초일목이 다 다시 내지로 들어왔으니 여기에 농업을 장려하고 국토를 확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다 할 계책을 드리지 못한 채 경사스러운 소식을 들은 것이 부끄러우며

                         돌을 깎아 공을 새길 만한 공로는 세우지 못하였으나 잔을 들어 만수무강을 축원함으로
                         써 저희들의 기쁜 마음을 표시하는 바입니다.”(1117년)                 47)



                   고려사 기록을 보면 태조 때부터 말갈과 여진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서로 혼재되어 있다

                 가 1066년 거란이 국호를‘대요(大遼)’로 고치고, 1114년 생여진의 완안 아골타가 반란을 일으켜
                 1115년 황제로 자칭하고 국호를‘金’이라 하였던 이후로는 여진에 대한 기록만 나온다.

                   상기 내용으로 보아 거란족이 강성해져 요제국을 건설하자 말갈의 일부가 거란에 흡수되었고,
                 결정적으로 여진이 강성해져 금제국을 건설하자 대다수의 말갈이 여진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말갈의 기록이 안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말갈이 여진으로 대체되는 시점과 계기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고려사에서는 여진, 여진말갈, 동여진, 서여진, 동서여진, 동북여진, 서북여진, 북여진, 거란, 발
                 해, 흑수말갈, 동번, 북번, 탐라, 우산국, 일본국 대마도, 정안국, 흥요국, 송나라 상인, 해족, 대식

                 국(서역)이 등장하면서 해당 국가 및 부족의 장군이나 대신들이 백성을 데리고 귀순하거나, 토산
                 품, 토산 말, 준마, 담비가죽, 호노, 호시 등을 보내주거나, 내조하거나, 국경 분쟁 등을 반복한다.

                   말갈도 921년 태조때부터 흑수말갈의 추장 고자라가 1백 70명을 데리고 귀화한 것을 시작으로


                 47)『高麗史』卷14「世家」第14 睿宗 丁酉 12年條,
                 “辛卯 遼來遠城牒曰 昨爲生女眞及東京渤海背亂致不廣收得田禾官司雖有見在穀粟所有正軍外
                 平閑民戶闕少粮儲權時掇借米貨五萬石贍濟民戶比候來秋却具元借米貨碩斗還充必不闕少王命兩府臺省侍臣知制誥文武
                 三品都兵馬判官以上會議中書省令判兵馬事金緣等傳諭統軍若歸我兩城人物則不須掇借米貨 再三往復統軍不肯從 及金兵
                 攻取遼開州遂襲來遠城及大夫乞打柳白三營盡燒戰艦擄守船人統軍尙書左僕射開國伯耶律寧與來遠城刺史檢校尙書右僕
                 射常孝孫等率其官民載船一百四十艘出泊江頭移牒寧德城曰女眞背亂幷東京渤海續有背叛道路不通統軍部內田禾未收米
                 穀踊貴致有貧寒人等 爲高麗國隣近住坐已曾借糧推進不行掇借爲此部內人民赴裏面州城趂逐米粟去此至回來爲相和事在
                 此州幷地分交付去訖仰行交受已後准宣命施行以來遠抱州二城歸于我遂泛海而遁我兵入其城收兵仗及錢貨寶物甚多金緣
                 具狀馳奏王大悅改抱州爲義州防禦使以鴨江爲界置關防甲午百官表賀略曰鴨綠舊墟雞林故壤越自祖宗之世本爲襟帶之防
                 逮乎中世之陵夷頗遘大遼之侵蝕非惟人怒實作神羞  又曰比因兩敵之有爭頗慮二城之所屬靺鞨之請獻殆從天啓鮮卑之潛遁
                 固匪人爲我泉我池復爲內地實藉實畝拓大中區又曰慚乏壯猷之助初聞吉語之傳刪石紀功未奏形容之頌奉觴稱壽願伸率舞
                 之懷.”



                                                                                                      45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