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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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로 자생하고 있었다. 일부 거란족의 영향도 받았고, 고려의 영향도 받았지만 고려에서 동북9성을
돌려주자 그 곳에서 ‘金’이 일어난 것이다.
『금사』「세기」에서 보면 수ㆍ당 이래로 흑수말갈인들이‘金’을 세웠던 생여진의 모체가 되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금사』「세기」뿐만 아니라 ‘金’의 초기 실정을 직접 견문하였던 송인(宋
人) 홍호(洪皓)(1586 ~ 1646)의 『송막기문(松漠紀聞)』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수ㆍ당 시대의
말갈 7부 가운데, 흑수말갈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黑水라는 강의 주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 흑수가 지금의 삼성(三姓)(지금의 흑룡강성 의란현 근처)이동지방(以東地方)의 송화강 하류 지
역이었다. 그런데 그 송화강은 시대에 따라 그 명칭이 달랐다. 송화강이 중국사서에 처음 나타난
것은 후한 시대였다. 그때의 이름은 약수(弱手)였으며, 그 이름은 진대(晋代) 까지 계속 되었다. 그
후 남북조시대에는 속말수(粟末水)라고 불렸고, 수ㆍ당시대에는 속말수라고도 하였지만 삼성이
동(三姓以東)의 송화강 하류를 흑수라 부르기도 하였다. 요대(遼代)에는 혼동강(混同江)이라 하였
으며, 특히 북류송화강의 하류지역을 압자하(鴨子河)라 부르기도 하였다. 금대(金代)에도 요대(遼
代)와 같이 혼동강이라 하였는데 그 아명(雅名)으로 흑룡강(黑龍江) 또는 흑수(黑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부르던 송화강을 오늘날과 같은 개념의 송화강과 흑룡강을 가
리키게 된 것은 명대(明代) 이후였다. 이와 같이 송화강 하류지역의 삼성(三姓) 이동지방(以東地方)
에 거주하던 흑수말갈이 나중에‘金’을 세운 생여진의 모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들이 원거주지
로부터 활동영역을 확장하여 진출하였던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실은 고려나 중국의 사서에 나
타난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발해 멸망 후 남하했던 흑수말갈인들은 고려의 북변(北邊)까지
이르렀고, 서진했던 흑수말갈인들은 토지가 비옥한 아십하유역(阿什河流域)에 정착하여 그들의
터전으로 삼았다. 이들이 그 후 삼십부 여진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46)
㈑-1. “금군이 요나라의 개주를 탈취한 다음 내원성과 대부, 걸타, 유백 세 병영을 습격하여 병
선을 모조리 불태우고 배를 지키던 사람까지 사로잡아 간 뒤에야 통군 상서 좌복야 개국
백 야율녕이 내원성 자사 검교 상서 우복야 상효손 등과 함께 자기 관민들을 1백 40척의
배에 모아 실어서 강 어귀에 정박하고 영덕성에 공문을 보내기를“여진이 반란을 일으키
고 동경, 발해까지 배반하여 길이 막혔으며 통군부 관내에는 곡식을 거두지 못하고 쌀이
발라져서 가난한 백성들이 생기게 되었다. 고려와 인접되어 있는 곳에서는 식량을 빌리
려고 벌써 교섭하여 보았으나 이 일이 추진되지 않기 때문에 관내 인민들이 식량을 구하
기 위하여 후방지역의 고을로 달아났다. 여기에 와서 서로 화친을 청하고 이 고을 인민과
땅을 인계하여 주노니 이것을 받은 뒤에 선포한 명령대로 시행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내원, 포주 두 성을 우리에게 돌려주고 드디어 바다를 건너 도망하였다. 우리 군사가 그
성에 들어가서 군기, 화폐, 보물들을 거둔 것이 매우 많았다. 김연이 급보로 이 사실을 아
46) 이동복,「금대 여진사회구성의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박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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