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7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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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조선열전」에 나타난 패수 위치 고찰  정규철



                    옛 지리지에 말하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한 한漢이 일어났을 때 조선이 너무 멀어 요동의 옛 성을 다시 수리하여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
                    지금과 옛 것을 생각하여 볼 때 『수경』의 기록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27)



                   여기서 역도원은 『한서』의 패수 주석인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水

                 西至增地入海).”라는 기록에서 패수 방향이 서쪽으로 흐른다고 이해한 듯하다. 그리고 고구려 사신
                 으로부터 고구려 국도는 패수 북쪽에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역도원은 고구려 패수가 서쪽으로

                 흐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위만이 도읍했던 왕험성을 당시 고구려의 도읍으로 이해하고 있었
                 다. 이에 낙랑군의 패수와 고구려 국도를 흐르는 패수를 같은 강으로 오인하고 『수경』의 패수 방향

                 이 틀렸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요동군 험독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패수가 동에서 서

                 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낙랑군 서쪽을 흘러 증지에 이른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낙랑군
                 의 속현들은 중 일부는 하천을 경계로 설정되어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므로 하천의 굴곡에 따라 방

                 향이 달라질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서』 「지리지」의 기록과 『사기』에서 위만
                 이 동쪽으로 망명하면서 건넌 패수의 방향을 반대로 볼 이유가 없는 것이다.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패수가 낙랑군 누방현(또는 패수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
                 다고 하여    28)  패수의 방향이 처음 등장한다. 『수경주』에 기록된 『수경』의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

                 서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29)
                   역도원이 전한의 패수를 고구려의 패수로 비정한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사

                 기』에서는 위만이 패수를 ‘서에서 동’으로 건넜다고 하였으므로 패수의 방향은 북에서 남의 방향
                 이다. 『한서』 「조선열전」에서도 『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므로 후한 때까지는 패수가

                 바뀌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 『수경』에서는 서북에서 동남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사기』의 기록에 따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을 ‘동남’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허신도 패수는 누방을 나와서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였으므로 패수는 동쪽으로
                 흘러야 한다. 셋째, 역도원과 같은 시대 인물인 송나라 배인裴駰은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도 패

                 수는 동남으로 흐른다고 주석하였다.               30)



                 27) 『水經註』, “許慎云 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 十三州志曰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 盖出其縣南逕
                 鏤方也. 昔燕人衞滿, 自浿水西至朝鮮. 朝鮮故箕子國也. 箕子教民以義田織信厚約以八法而下知禁, 遂成禮俗. 戰國時滿乃
                 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里.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討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
                 浿水東流無渡浿之理, 其地今髙句麗之國治, 余訪蕃使言, 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 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以朝鮮為逺, 循遼東故塞至浿水為界. 考之今古, 于事差謬, 盖經誤證
                 也.”
                 28) 『說文解字』. “浿: 水出樂浪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
                 29) 『水經注』. “浿水, 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30) 복기대,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 한사군인식 2」, 『선도문화』 Vol.25, (2018), 229~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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