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4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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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일치하며, 서기전 4~2세기 청천강을 경계로 고고문화상이 확연히 구별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고학 발굴 성과로 보아 낙랑군 조선현은 현재의 평양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 19)
송호정은 연·진 장성 유적이 요하유역에 이르렀으므로 장성 동쪽에 존재했던 패수는 요하 서쪽
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위만이 거주하던 진秦의 옛 공지를 청천강~대동강으로 보기에는 너
무 좁고, 명도전 유적이 청천강 이북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때 패수는 압록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
이라고 하였다. 『사기』 조선열전의 패수는 청천강이었는데 한대에 와서 압록강으로 변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관리상의 문제로 한이 직접 관할하는 장새障塞를 요동지역으로 축소한 것으
로 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청천강은 전국·진·한대에 걸쳐 줄곧 패수로 호칭되어 있었다는 주장
이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20)
송호정은 사기 조선열전의 패수는 요동고새遼東故塞 이남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패수의 위치
를 요동고새 남쪽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 요동고새는 현재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음
이 명확하기 때문에 패수는 압록강 이남의 한반도 서북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21) 그러
나 해당 기록에서 패수가 요동고새 남쪽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그의 견해는 당시 요동은 지금의 요동반도이고 패수는 청천강이라는 고정 관념이 빚어낸 판단
에 불과하다. 22) 준왕이 망명한 위만에게 거주를 허락한 상하장은 한과 국경을 이루는 패수 동쪽으
로 위만조선 서쪽 변경의 100리나 되는 넓은 지역이다. 왕험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고 한 기록
이 있음에도 패수를 남쪽에서 찾는 것은 자의적 해석일 수밖에 없다. 패수는 한과의 서쪽 국경이고
상하장은 변경에 있으므로 평양 서쪽에서는 이러한 지리 조건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송호정의
패수 청천강설은 문헌에서 전하는 위치와 방위하고 맞지 않으므로 성립하기 힘든 주장이다.
최근 임찬경은 패수를 북경 동쪽을 흐르는 조백하潮白河로 보았다. 그는 연국燕國과 관련된 요
동은 한의 건국 초기인 서기전 206년에 한광韓廣이 봉해졌던 요동왕의 도읍인 무종無終과 계薊
일대라는 기록에 주목하였다. 23) 이 때 한나라가 수리 및 정비한 요동의 옛 요새들은 현재의 영정하
永定河와 조백하 사이에 있었으므로 조백하가 패수라고 하였다. 24) 임찬경의 견해는 기존 제 학설
보다 문헌상으로 당대 지리에 매우 근접했다고 본다.
근현대 이후의 패수 위치에 대한 연구의 바탕에는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요동 위치가 고대로
부터 변동이 없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는 고대 지명을 비정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
히 하북성 동북부와 요서지역은 고조선을 대표로 하는 한민족 세력과 서방 중원세력, 북방 유목세
19) 오강원, 「古朝鮮의 浿水와 沛水」, 『강원사학』 13호, (1998), 61~82쪽.
20) 송호정, 「古朝鮮의 位置와 中心地문제에 대한 고찰」, 『韓國古代史硏究』58호, (2010), 19~60쪽.
21) 송호정, 「衛滿朝鮮의 王儉城 위치에 대한 최근 논의와 비판적 검토」, 『역사와 담론』 No.92, (2019), 18쪽.
22) 송호정(2019), 16~7쪽.
23) 『史記』 「項羽本紀」. “徙燕王韓廣爲遼東王.[集解徐廣曰:都無終.] 燕將臧荼從楚救趙, 因從入關, 故立荼爲燕王, 都
薊.”
24) 임찬경, 「조선 즉 위만조선과 창해군의 위치에 관한 연구」, 『국학연구』 22권, (2018),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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