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2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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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永平(현 하북성 노룡현), 광령廣寧(현 요령성 북진시) 사이에 있다가 나
중에 연燕의 장군 진개에게 쫓기어 땅 2천 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가니, …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하였다. 13)
고 하면서 평양 지명이 이동한 것처럼 패수도 그와 같다고 보았다.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패수 한반도설이 많이 주창되었고 중기 이후 역사지리에 관심
이 많아지면서 요동설 또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조선 후기에 요동설이 늘었다고 하지만
패수에 대한 고증은 고대부터 요동의 위치가 변함없다는 고정 관념이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고조
선의 수도 인식은 대체로 한반도 평양 중심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의 한반
도 중심 역사지리 비정은 대일항쟁기에 일본인들이 반도사관을 고착시키는 근거로 삼았고 현재
한국 역사학계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학설 학자
대동강설 박상, 안정복, 유득공, 한진서, 정약용, 홍경모, 윤정기, 이유원
청천강설 한백겸
압록강설 이익, 윤두수, 유형원, 이세구, 이만운, 이긍익, 정약용
灤河설 김경선
淤泥河설 신경준, 김정호
渾河說 성해응
遼河說 홍여하
표1 근대 이전 패수설 도표(신운용, 「조선시대의 ‘패수浿水’ 논쟁과 그 의미」; 문성재, 『한국고대사와
한중일의 역사왜곡』 참조)
2. 근대 이후 패수 위치에 대한 연구현황
한국학계의 패수 위치에 대한 연구는 혼하와 압록강, 청천강으로 대변되고 있으며 대다수가 지
금의 요하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저변에는 현재의 요동과 진한시대의 요동을 동일하
게 보기 때문에 위만이 요동을 지나 패수를 건넜다고 하는 『사기』의 기록에 의거하여 비정할 수
있는 강이 압록강이나 청천강이다. 이것은 『수경』에서 말한 패수의 흐름이 한반도의 여러 강들 중
13) 朴趾源, 『熱河日記』 渡江錄 二十八日乙亥. “然而自漢以來, 中國所稱浿水不定厥居, 又吾東之士必以今平壤立準, 而紛
然尋浿水之迹. 此無他, 中國人凡稱遼左之水率號爲浿, 所以程里不合, 事實多舛者, 爲由此也. …… 愚以爲箕氏初居永廣之
間, 後爲燕將秦開所逐, 失地二千里, 漸東益徙, 如中國晋宋之南渡, 所止皆稱平壤, 今我大同江上平壤卽其一也. 浿水亦類
此. 高句麗封域時有贏縮, 則浿水之名亦隨而遷徙, 如中國南北朝時, 州郡之號互相僑置.”, 한국고전번역연구원 한국고전
종합DB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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