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0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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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고대사에 대한 자체 기록이 부족하였던 탓에 중국 문헌에 의거하여 조

                 선이 회복해야할 역사영토를 구성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한사군을 연구한 조선의 학자들은 오늘날 못지않게 한사군 연구의 핵심인 패수 위치 논쟁을 치

                 열하게 전개하였다. 패수의 위치에 따라 한사군의 위치도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조선의 한사군 연구
                 는 패수 위치 비정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3)

                   패수의 위치에 대해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인 듯하니, 패수는 곧 대동
                 강이다.” 라고 하여 패수는 대동강이라는 인식이 나타난다. 이러한 인식은 『세종실록』(1454, 단
                         4)
                 종 2년) 「지리지」에도 『삼국사기』를 따라 그대로 이어진다.



                    신臣이 상고하건대, 『문헌통고文獻通考』에 “한나라가 일어나자 멀어서 지키기가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 고새故塞를 수축하였는데,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고, …… 김부식은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낙랑군은 산의 둘레를 따라 외성을 쌓았는데, 남쪽으로 패수 가에 임
                    하였다.”고 하였고, …… 또 수양제의 동정東征 조서詔書에 말하기를, “창해滄海를 배로 천리를

                    가서 패강을 가로 질러가면 평양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따르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
                    가 분명하다. 그런데 『문헌통고』에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압록강을 가리키어 패수라 한

                    듯하니, 대개 잘못 전해들은 것이다.           5)



                   『세종실록』 지리지의 대동강 패수설은 『문헌통고』에서 말한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았으나, 『삼
                 국사기』의 패수와 『당서』의 패강浿江을 동일한 강으로 보아 현 평양의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대동강이 패수라고 하면 현도군도 대동강이 아래쪽에 있어야 한
                 다.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현도군은 요동에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삼국사기』, 『당서』, 『세종실록』의 패수 기록은 “위만이 패수를 지나 조선의 강역으로 들어갔다.”
                 는 『사기』의 기록과 상반된다는 점에서 위만이 건넌 패수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모순은 패수 대동

                 강설에 자주 지적되는 문제이다. 이는 『동국여지승람』(1481, 성종 12년)과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중종 25년) 찬자들의 3패수설(압록강, 대동강, 저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6)

                   이러한 조선 전기의 패수 한반도설은 조선 후기 영조 대에 들어와서 신경준申景濬(1712~1781)
                 등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 영조 46년)의 찬자들은 패수를 요양의 니하泥河(淤泥河)로

                 ‘확정’하면서 관찬사서의 입장은 요동설로 바뀌게 된다.                     7)

                 3) 신운용, 「조선시대의 ‘패수浿水’ 논쟁과 그 의미」, 『국학연구』 제20집, (2016), 112쪽.
                 4) 『三國史記』 「雜志」, 地理 高句麗.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則大同江是也.”
                 5) 『世宗實錄』 「地理志」 平安道 平壤府. “臣按文獻通考云: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 又按金富軾
                 曰: 唐書云: 樂浪郡也隨山屈繞爲郛南涯浿水, …… 又隋 煬帝東征, 詔曰: 滄海航千里橫絶浿江, 逞造平壤. 以此言之, 今大同
                 江爲浿水明矣. 則通考以浿水爲界, 似指鴨綠江爲浿水, 蓋傳聞之誤.”
                 6) 신운용(2016), 111~157쪽.
                 7) 『東國文獻備考』 「輿地考-浿水縣」. “淵秦經理, 未嘗及於鴨綠江. 則浿水乃在於鴨江之北, 遼東之南者, 而泥河之爲浿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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