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8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P. 238
동북공정 분과
2. 고조선의 멸망과 한사군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에서 고조선은 각각의 소국들로 연합을 이룬 신조선・불조선・말조선
세 개의 조선이 다시 연합국을 이룩한 나라라고 했다. 각각의 조선은 단군이 지배했으며 신조선은
신조선에 속한 소국들과 신조선을 다스림과 동시에 세 개의 조선 모두를 지배하는 대단군인 조선
왕이 지배했고, 불조선과 말조선은 각각의 조선에 속한 소국들을 지배하며 자신의 조선을 지배하
는 소단군인 조선후가 지배한 나라다. 그런 고조선이 불조선의 조선후인 기씨가 신조선 조선왕 해
씨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 스스로 왕이라 칭함으로써 삼조선은 분립하기 시작하였는데, 연나라
가 칭왕(稱王) 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23년이므로 세 조선의 분립은 기원전 4세기 경이다. 42)
삼조선 분립의 원인으로 작용한 단군 사상의 붕괴는 삼조선의 성립과 버팀목이 되었던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의 붕괴로 이어져서, 계급은 자연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힘만 있으면
파괴할 수도 있고 건설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세력 쟁탈의 전란이 사방에서 일어나 열국쟁웅
(列國爭雄) 시대를 형성하게 된다. 북부여와 동부여 고구려는 신조선의 판도 내에 세워진 나라들로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 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시 분열하여 위의 3국이 되었는지 아니면 부여란
왕조 없이 신조선으로부터 위 3국이 되었는지 고찰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신조선이 흉노에게 패
한 때가 기원전 200년 경이고, 동・북부여의 분립 또한 기원전 200년 경이니, 후설(後說)이 사실
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43) 기술하고 있다. 신채호 역시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190년경 전
후로 본 사람으로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37년에 맞추고 보니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아 신조선
판도 내에 건국된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을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결국 “고구려 건국 원년으
로부터 1백 몇십 년을 소급하여 기원전 190년경의 전후 수십년 동안을 동・북부여, 고구려가 분
립한 시기로 잡고 그 이하 모든 열국도 같은 시기로 잡아서 열국사(列國史)를 서술하고자 한다.” 44)
고 했다.
신채호가 주장한 삼조선 중 말조선의 영역은 압록강 이남이고 만주에는 신조선과 불조선이 있
었다. 신조선은 ‘스라’ 곧 지금의 하얼빈을 도읍지로 흑룡, 길림 두 성과 연해주 남단에 자리했
다. 불조선이 요동반도를 소유하고 도읍한 개평현(蓋平縣) 동북의 안시(安市) 고허(古墟)는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이 그곳으로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이다. 45) 낙랑군과 현도군이
실존할 당시인 후한 영제 때 응소(應劭)가 위만조선이 도읍한 왕검이 험독현에 있다고 하였고, 동
진 효무제 때의 서광이 창려(昌黎)에 험독현이 있었다고 46) 했다. 위만조선의 도읍은 창려로 비정
42) 신채호,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 (2006), 116~124쪽; 고조선의 국가형태에는 이견이 있지만, 필자는 신채호
의 학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판단되어 그 학설을 따르기로 한다.
43) 신채호,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 (2006), 145~157쪽.
44) 신채호,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 (2006), 154쪽.
45) 신채호,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 (2006), 118~136쪽.
46) 김종서,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비정 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229쪽.
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