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5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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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연대 재정립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 연구 신용우
정립해서는 안 된다. 1대 추모왕은 세손 삭감에 관여되지 않았음이 명백함으로 일어났던 모든 기
록은 180년을 앞당겨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2대 유리왕부터는 세손 삭감에 관여되어 있
는 관계로 기록된 사건을 무조건 180년 앞으로 당겨보는 것은 무리다. 세손 삭감을 위해 합쳐진
왕들의 기록으로 인해서, 각각의 왕들과 사건에 대한 기록이 얼마나 앞당겨져야 하는지를 구분하
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리왕부터 태조대왕 재위 마지막까지 180년이 나누
어지고, 차대왕 즉위년부터는 원래 기록된 연대와 같이 가야 하는데 그걸 나눌 기준이 없다. 다만
평균적으로 생각해서 어느 정도 소급되어야 하는지는 계산할 수 있기에 적어도 대무신왕까지는
한사군이 설치된 기원전 108년보다는 앞선 기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단
순한 추측이 아니라 삼국사기 에 보면 대무신왕 3년 10월에 부여왕 대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두
개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오는 기사가 나온다. 대소가 추모왕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금와왕의 맏아들로 추모왕이 부여에 있을 때 추모왕을 처단
할 것을 제안할 정도의 나이였으니 최소한 10~15세 이상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가정하에서
볼 때, 기원전 217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느니 기원전 108년까지 대소가 살아 있었다면
119~124세 이상 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무신왕 재위까지는 기원전 108년 이전이라고 볼 수 있고
그때까지의 고구려 영역은 한사군의 위치와 관계된 영역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연도를 소급해
야 하는 문제를 제외하면, 고구려의 영토변천 과정은 삼국사기 에도 잘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에 의하면 동명왕은 즉위하자마자 인접해 있던 말갈을 복속시킨다. 32) 동명왕 2년에
는 비류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고 비류국의 왕인 송양을 우두머리(主)로 삼았다고 33) 했으니 비
류국을 제후국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6년에 행인국과 10년에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
벌하는 등 압록강 유역을 확보하여, 백두산 부근과 두만강 하류의 동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간
다. 34)
유리왕 11년에는 부분노(扶芬奴)가 약한 병력으로 남쪽을 공격하다가 도망치면 선비가 쫓아 올
것이고 그때 부분노가 정예병을 이끌고 성으로 달려 들어가면 선비가 놀라 되돌아올 때 왕이 군사
를 이끌고 후방을 공격하면 승리한다는 계책으로 선비를 복속시킨다. 35) 삼국사기 에 기록된 이
3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기 「권 제13 고구려본기 제1」, 20
22. 4. 25 검색; 땅이 말갈 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3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기 「권 제13 고구려본기 제1」, 202
2. 4. 25 검색; 2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다물도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主)로 삼았다.
34) 박노석, 「고구려 초기의 영토 변천 연구」, 전북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3), 17~29쪽.
3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기 「권 제13 고구려본기 제1」, 20
22. 4. 25 검색; 11년 4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비가 지세의 험준함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고,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중략) 부분노가 나와서 말하기를,
“선비는 지형이 험하고 (중략) 용감하나 어리석으므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부분노가 관문을 맡아 막고 싸우니, 목을 베어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며
나아가니, 선비는 앞뒤로 적을 맞아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여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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