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3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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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연대 재정립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 연구 신용우
주장했다.
신용우는 사라진 세손은 5세손이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5세손에 얽매여 10명의 왕 재위 연수를
합산할 것이 아니라 5명의 재위 연수를 합산하는 것이 오히려 옳다고 주장했다. 왕국의 초기 왕권
이 옮겨가는 과정이 반드시 부자라는 보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이동 과정에서 민중왕과 모본왕
의 경우처럼 세손이 얽힐 수도 있다는 논리다. 따라서 유리왕부터 태조대왕까지가 다섯 명이고 그
뒤를 이은 차대왕과 신대왕은 형제로 같은 세손이 되어 신대왕까지 7명이 되므로, 5명과 7명에
대해 검토해보았다. 그 결과 추정되는 고구려 건국연대는 기원전 217년이라는 합리적인 논리와
함께, 기존에 고구려 건국연대를 소급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제시되었던 타당성 있는 주장들에 대
한 논리를 추가로 제시하며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17년으로 재설정했다. 이러한 이론은 신
채호 등의 세손 계산 방식에 의해 광개토대왕이 삼국사기 에 13세손으로 기록된 것으로 계산해
도 마찬가지다. 13세손으로 볼 때는 추모왕이 포함되고 4세손이 삭감된 것이므로 추모왕 포함 4
세손에 대해서 검토해야 하는데, 4세손 대에 고구려 역사 삭감에 직접 이용된 것으로 추정한 모본
왕과 태조대왕이 속해있다. 따라서 모본왕과 태조대왕의 재위 연수까지 포함해야 하므로, 지금까
지 삭감되어 알려져 온 고구려 건국연대인 기원전 37년에, 추모왕에서 태조대왕까지의 재위 연수
인 183년을 합산하면 기원전 220년으로, 가장 가까운 갑신년인 기원전 217년이 고구려 건국연대
가 되어 결과는 마찬가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에서 유류(孺留), 유리(琉璃), 유리(類利)는 다 ‘누리’로 읽고 ‘세상’이라
는 뜻이며 명(明)은 밝음이라는 뜻이다. 무(武), 주류(朱留), 무휼(無恤)은 다 ‘무뢰’로 읽고 ‘우박’이
라는 뜻이고 ‘신(神)’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유리(琉璃)와 명(明)은 시호로 쓰고 유리(類利)는 왕의
이름으로 쓰고, 무(武)와 신(神)은 시호로 쓰고 무휼(無恤)은 이름으로 쓰는 것은 삼국사기 저자의
망단(妄斷)이라고 했다. 또한 대무신왕 즉위 15년 여름 4월에 호동이 최리의 사위가 된 사실을 기
록해 놓고 낙랑국 공주와 낙랑국 멸망을 계획하고 실행하며, 같은 해 11월에 그 큰어머니인 왕후를
강간하려 했다는 고소로 자살하였다는 것이 모두 11살의 일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고구
려사의 연대를 삭감하고 사실들을 여기저기로 옮겼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순덩어리의 기록이 있
게 된 것 29) 이라고 했다. 고구려 건국연대를 늦추기 위해서 초기 왕들의 수를 삭감하다 보니 시호와
이름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뒤엉켜서 혼란을 야기한 것에 대해 개탄한 것이다. 또한 연대를
줄이다 보니 사건이 일어난 해가 맞지 않아서, 대무신왕 15년에 11살 어린애인 호동이 4월에 최리
의 낙랑국 공주와 결혼하여 낙랑국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여 성공하는가 하면, 호동이
공을 세우자 왕후가 자기 아들들의 앞날을 위해서 후궁의 아들인 호동을 죽이려는 계책으로 호동
이 자신을 강간하려 했다고 거짓을 고변하는데 그 역시 11살 어린애가 저지른 짓이 돼 버렸으니,
이 모든 것이 고구려사의 연대를 삭감하는 바람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신채호 역시 고구려
건국연대가 늦춰진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사학자로 결국 기원전 190년경의 전후
29) 신채호,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 (2006), 169~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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