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9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P. 239
고구려 건국연대 재정립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 연구 신용우
(比定)되는 것이다. 위만조선은 기원전 200여년경에 기준이 불조선의 왕이 되고, 한 고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하자 옛 중립공지는 불조선의 소유로 하고 헌우락(軒芋濼)을 국경으로 삼았다. 그런데
기원전 194년에 한의 연왕 노관의 편이 되어 한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한 위만이 불조선으로 들어
와서 귀화를 청하였다. 이에 불조선 왕 기준이 위만을 받아주고 신임하여 패수 서쪽 옛 중립공지를
주어 그곳에서 이주해온 조선의 유민을 비롯한 연, 제, 조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위만이 자
신을 받아 준 기준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47)
고조선의 멸망은 한 무제의 침입에 의해서 일시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삼조선 중 신조선은
부여와 고구려가 건국되어 급속히 성장하면서 가장 먼저 멸망하고, 부여와 고구려가 신조선의 영
역은 물론 주변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무제의 침입으로 멸망한 고
조선은 위만이 차지하고 있던 위만조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한사군 역시 위만조선의
영역을 위주로 설치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고구려가 기원전 217년에 건국되었다는 것을 인정하
면 한사군의 위치는 요하 서쪽에 자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한사군이 만주
와 한반도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위만조선과 함께 고구려와의 전쟁을 각오해야 했었다. 요하를 동
쪽으로 건너기 위해서는 고구려를 피해 갈 수가 없던 것이다.
3. 한사군의 위치 비정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전 217년에 의무려산과 의현 일대인 졸본에서 건국
되어 영토를 넓혀나가면서 동명왕은 말갈을 복속시키고 비류국을 제후국으로 삼고, 행인국과 북
옥저를 정벌한다. 유리왕 때에는 시라무렌강 유역의 선비를 복속시키고, 대무신왕 때는 북쪽으로
부여까지 복속시킨 것은 물론 남쪽 평안도에 있던 최리의 낙랑국까지 정벌하였다. 한 무제가 위만
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시킨 기원전 108년에는 요하 서쪽부터 만주 전체와 한반도 내륙 깊숙이까지
실질적인 고구려 영토라고 할 수 있다. 직접 다스리거나 혹은 정복한 나라를 제후국으로 삼아서
국호는 유지해주었을지언정 실질적으로는 고구려 영토였던 것이다. 만일 종래의 통설처럼 한사군
이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와 한반도에 근접한 만주에 걸쳐서 설치되었다면, 요하 서쪽부터 만주 전
역과 한반도에 자리 잡고 있던 고구려가 한 무제와의 전쟁에서 패한 것을 의미한다. 당시 한나라
쪽에서 보자면 고구려 영토의 최후방에 한나라의 사군이 설치됐다는 것은, 기원전 108년에 한 무
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고구려를 침략해서 최후방까지 점령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렇다면 고구려는 그때 멸망했거나, 운이 좋아서 멸망까지는 아니고 훗날 재기를 도모할 수 있는
정도로 살아남았더라도 그것은 대단히 큰 전쟁이다. 영역의 크기를 통해서 볼 때 규모나 동원된
병사수가 위만조선과의 전쟁 보다 수십, 수백 배 더 크다고 할 수 있기에 그에 대한 전쟁 기록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 무제와 고구려의 전투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다만 신채호
47) 신채호,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 (2006), 134~135쪽.
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