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7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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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연대 재정립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 연구 신용우
다. 이에 대해서 임찬경은 [그림 1] 37) 과 같이 고구려 첫 도읍의 위치에 대한 비정을 처음으로 시도
한 삼국사기 의 기록에 의하면 그 위치는 대체로 요하를 서쪽으로 건너 요(遼)에서 설치한 의주
(醫州) 인근 의무려산 일대였다고 추정했다. 또한 삼국유사 역시 흘승골성의 위치를 요하 서쪽
의무려산 일대라고 비정하는 것을 근거로 졸본은 요녕성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의현(義縣) 일대라
는 학설을 제기했다. 38) 임찬경의 학설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요하 서쪽에 있었다는
많은 이론이 그 타당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의무려산은 요하 서쪽으로 고구려가 건국할 때부터 요
하 서쪽을 점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하 서쪽 의무려산과 의현 일대가 고구려 첫 수도인 졸본이
라면, 선비족 영역으로 알려진 시라무렌강 남쪽에 자리 잡고 건국한 고구려가 선비를 복속시킴으
로써 의현 일대는 물론 그 북쪽 시라무렌강 유역의 선비족까지 정벌하여 요하 서쪽 영역을 점유했
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유리왕은 재위 22년에 지금의 요녕성 철령 일대로 추정되는 국내성
으로 39) 천도한 후 33년에 양맥국을 점령한다.
제3대 대무신왕 때는 고구려 북쪽의 부여를 복속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가 멸망하지는 않았지
만, 고구려의 속국이 되어 실질적으로 복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에 의하면 대무신왕
재위 4년 12월부터 5년 2월에 걸쳐서 부여를 공격하였다. 이때 대무신왕은 부여를 공격하러 가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북쪽 부여와의 사이에 있던 소규모 세력을 복속시키고 그중에 하나인 괴유가
부여 왕 대소의 목을 벤다. 대소가 죽자 대소의 막내동생은 100여명을 이끌고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을 죽이고 갈사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대소의 종제는 만여명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대무신
왕은 그를 왕으로 삼고 연나부에 두고 낙씨(絡氏)라는 성씨를 주었다 40) 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부여를 제후국으로 삼아 북쪽을 안정시켰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이후에 남쪽에 있는 개마고원이
나 백두산 근처로 추정되는 개마국을 점령하여 군현(郡縣)으로 삼고 함경도 해안지역으로 추정되
는 구다국을 점령한다. 그리고 함흥 북쪽의 흥원 부근에 있던 매구곡인들의 투항을 받고 재위 15년
에는 평안도에 있는 최리의 낙랑국을 정벌한다. 41) 고구려는 한사군이 고조선을 침략한 기원전
108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대무신왕 재위 때까지 요하 서쪽 의현 일대와 시라무렌강 유역부터 만
주 전역과 평안도까지를 영역으로 삼고 있던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가 광범위한 영역을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고조선을 침범한 한나라가 요하를 건너서 동쪽으로 진군하는 것은 고구려와의 전쟁
까지 감수해야 하므로 요하를 건너기 전에 진군을 멈췄을 것이다. 즉,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했을
당시 요하 동쪽으로 진군할 수 없던 이유 중 하나가 되는 것으로 한사군의 위치와 만주의 영토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다.
37) 임찬경, 「고구려 평양 위치 왜곡과 그 극복 방안」 간도학보 제2권 제2호, (2019), 117쪽.
38) 임찬경, 「고구려 첫 도읍 위치 비정에 관한 검토」 선도문화 제20권, (2016), 303~335쪽.
39) 복기대, 「고구려 국내성 및 환도성 위치연구」 인문과학연구 제65집, (2020), 175~181쪽.
4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기 「권 제14 고구려본기 제2」, 20
22. 4. 30. 검색.
41) 박노석,「고구려 초기의 영토 변천 연구」, (2003), 75~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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