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2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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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1,000년에 못 미쳤다고 일컫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다. 당회요 의 기록 역시 기원전 217년이 고
구려 건국연대임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아울러 고구려 건국연대의 소급을 주장한 학자들이 고구려가 한나라의 침입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제시했던 고구려현은 그들의 주장처럼 고구려라는 나라가 그 시기에 존재했으
니까 고구려현이라는 지명을 붙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북한 학자들은 “ 후한서 「고구려전」에서
고구려 전체를 한나라의 고구려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소속시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나라는 고구려의 서쪽 변방에 ‘고구려현’, ‘서개마현’, ‘상은태현’ 등 세 개의 현을 가진 현도군을
설치했을 뿐이다.” 25) 라고 했다. 또한 신채호는 “고구려현은 한 무제가 고구려를 고구려현으로 만
들려고 하다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하여 물러가서, 지금의 태자하 부근에 현을 하나 만들어 놓고
조선 열국의 망명자와 포로 등을 그곳에 살게 하여 ‘고구려현’이라 칭하면서 현토군에 소속시킨
것” 26) 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그 위치에 대해서는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고구려현
은 고구려 내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이름만 고구려에서 빌려왔을 뿐이다. 조선이 망하고 그 유민들
로 채워진 곳이지만 당시 조선은 존재하지 않고 고구려가 존재할 때이므로 ‘고구려현’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한 무제가 고구려현으로 삼았다는 그곳은 고구려와는 무관한 조선의 유민들, 특히
위만조선의 유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고구려는 한나라 이전인 진나라 때 건국된 것이 확실할 뿐만
아니라, 중국에 한 번도 굴복하지 않은 독자적인 국가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할 수 있다.” 27)
2. 고구려 건국연대의 비정(批正)에 의한 재정립
북한 손영종은 고구려 초기 역사의 삭감에 대해서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추론하였다. 하지
만 5세손에 얽매여 유리왕부터 동천왕까지 10명의 재위 연수를 모두 합산한 것은 무리다. 또한
합당한 근거도 없이 기원전 221년보다 앞선 시기의 갑신년 중에 고구려 건국연대를 산정해야 한
다는 제시도 잘못된 것이지만, 특별한 근거도 없이 갑신년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기원전 277년과
337년을 상정해 놓고 기원전 337년은 ‘유국 1,000년 설’이 되어 잘 어울리지 않고 삼국사기 의
기원전 37년보다 300년이나 앞서 지나치게 길어 277년으로 본다는 28) 식의 건국연대 추론은 논
리적이지 못하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서 기존의 고정된 사관을 깨고 새로운 설을 정립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새로운 설을 도입하기 위해서, 때로는 일
정부분은 추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추론은 합당한 근거를
갖춰야 한다. 갑신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냥 두 연대를 설정하고 거기에서 흥정하듯이 선정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신용우는 합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기원전 217년을
25)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조선전사3 중세편(고구려사) (평양: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 38쪽.
26) 신채호,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 (2006), 218쪽.
27) 신용우, 「고구려 건국연대의 재정립에 관한 연구」 간도학보 제2권 제1호, (2019), 18~29쪽.
28) 손영종, 「고구려 건국년대에 대한 재검토」, (1990),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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