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0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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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불구하고 그는 나라의 기틀을 올바로 잡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태조대왕
은 제후들의 세력다툼에서 승리한 고추가인 재사의 아들로, 아버지의 세력을 등에 업고 고구려의
기틀을 제대로 만들 수 있었기에, 태조대왕이라는 묘호가 붙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
면에 태조대왕에게 축출된 국조왕은 제후들의 지지기반 없이, 나라의 기틀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서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했을 것이고, 그것이 왕위에서 축출당하는 덫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것
이 바로 국조왕을 죽게 하고 태조대왕을 즉위시킨 모종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은, 궁의 죽음이 한나라가 고구려 침략을 논할 정도로 중요한 시국 문제로 받아
들여졌다는 점이다. 이웃 나라의 왕이 죽을 때마다 전쟁을 논하는 것은 아니므로, 궁의 죽음은 나
라가 혼란한 상태에서 죽었기에 한나라가 전쟁을 논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의 기
록에 추론을 덧붙여 설명하는 이유는, 태조대왕 자체의 재위 연수나 기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단순히 혼자 94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위에 앉아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고, 삼국사기 에서
고구려 건국연대를 왜곡하는 방법이 왕의 수를 줄이고 줄여진 왕대의 사실들을 합하여 기록하는
것이었음을 감안하여 추론하자면, 삭감된 5명의 왕 중 하나가 태조대왕과 합산된 국조왕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논지로 볼 때 고구려 초기 왕들의 삭감된 연도를 계산하기 위해서 무조건 5세손에 맹종
하여, 대무신왕과 민중왕, 모본왕과 태조대왕과 차대왕 및 신대왕, 고국천왕과 산상왕을 각각 1세
손으로 보고 거기에 유리왕, 동천왕을 합하여 10명의 왕이 5세손을 이루었으니 그 왕들의 재위
연수인 267년 정도를 삭감된 것으로 보는 손영종의 이론 자체가 무리한 주장이다. 모본왕과 민중
왕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들이 왕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삼촌에게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모본왕과 태조대왕의 경우처럼 친척에게로 뛰어넘을 수도 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아들을 건너뛴
채 손자에게 돌아와 2세손이 1세손으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가정도 해 볼 수 있다. 사라진
5세손이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늦추기 위한 방편이었다면, 초기 고구려
왕들에 대한 기사 중에서 누구의 아들이라고 기록된 것이 실제로는 아들이 아니라 손자일 수도 있
다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같은 왕으로 치부되었으니 할아버지의 아들로 기록하면서
세대를 잘라내서 삭감시키는 방법을 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1세손으로 계
산하는 것이 사실은 2세손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필자는 고구려 초기에 삭감된 5세손의 재위 연수는
5세손에 얽매여 10명의 왕 재위 연수를 합하는 것이 아니라 5명의 왕 재위 연수, 즉 추모왕을 제외
한 초기 다섯 왕의 재위 연수를 합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견해다. 즉 유리왕부터 태조대왕까
지 5명의 재위 연수를 삭감된 5세손 왕들의 재위 연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조대왕의
뒤를 이은 차대왕과 신대왕이 같은 세손이므로 그 2명의 왕을 포함시켜서 삭감된 5세손 왕에 대한
재위 연수를 계산하는 것은 검토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전술한 논리에 의해서 계산하면 유리왕에서 태조대왕까지의 재위 연수는 165년이고,
차대왕까지는 184년, 신대왕까지는 198년이다. 기원전 37년에, 삭감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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