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1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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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연대 재정립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 연구 신용우
165년을 더하면 기원전 202년이고, 184년을 더하면 기원전 221년이며 198년을 더하면 기원전
235년이다. 고구려 건국연대에 대해서 기록한 고기들이 일률적으로 고구려 건국연대가 갑신년이
라고 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추정된 연도에서 가장 가까운 갑신년을 찾자면, 기원전 202년과 기원
전 235년 사이에 기원전 217년이 있다. 추정한 연대와 가장 가까운 갑신년이 불과 15년과 18년밖
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상당히 근접한 것으로, 다섯 왕의 재위 연수가 추정하여 산출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논리는 차대왕이나 신대왕을 포함하지 않고
필자의 원래 주장처럼 태조대왕까지 5명의 재위 연수만 합산해도, 기원전 202년에서 가장 가까운
갑신년은 기원전 217년이므로 마찬가지다. 차대왕 혹은 신대왕까지로 연대를 계산한 것은, 추정에
의해 연대를 도출해 내는 것이므로 좀 더 근접한 연대를 찾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리고 기원전 217년은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지 5년 되는 해다. 또한 진나라는 기원전 206년
에 패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섰으므로, 많은 학자가 고구려 건국연대를 소급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
로 제시했던, 삼국사기 에서 고구려가 진·한의 동북 모퉁이에 있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근거
가 된다. 만일 손영종의 주장대로 기원전 277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면 기원전 221년에 건국
된 진나라를 뛰어넘어, 고구려가 연·진·한나라의 동북쪽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했어야 옳
다. 손영종은 같은 논문에 연나라가 기원전 222년에 멸망했다고 23) 적고 있으면서도 오류를 범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기원전 217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또한 고구려 건국연대를 비정하는데서 빠질 수 없이 중요한 것은, 많은 학자가 고구려 건국연대
소급의 이유로 제시했던 <유국 900년 설>이다. 비록 비기라고는 하지만 당시에는 민심을 흔들었
고, 지금도 고구려의 삭감된 연대를 추정하는데 근거자료로 쓰이는 중요한 자료다. 중국 오대의
왕부(王溥; 922년~982년)가 저술하여 송나라 태조 2년(961년)에 완성한 책 당회요(唐會要) 권
95 「고구려」에 “고려비기에 전하기를 고려는 1,000년을 넘기지 못하고 80 노장에게 멸망한다고
했는데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80이다” 24) 라고 기록되기도 하였다. 당회요 가 완성
된 것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후의 일이고, 삼국사기 에 전하는 기록과는 약간 차이를 보이지만,
고구려 역사가 900년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기원전 217
년을 고구려의 건국연대로 하여 그 존립연대를 계산하면, 보장왕이 당나라에 항복한 668년까지
는 885년이 되고, 보장왕이 당나라에 항복하여 고구려를 잃고 요동주 도독으로 지내며 조선왕으
로 불리다가 죽음으로써 고구려 왕조의 막을 내리게 한 682년까지는 899년이 된다. 반면에 손영
종의 주장대로 고구려가 기원전 277년에 건국되었다면 보장왕이 항복한 해인 668년까지는 945
년이 되고 보장왕이 죽음으로써 고구려 왕조가 막을 내리게 되는 682년까지는 959년이 된다.
945년이나 959년 정도의 연수라면 900년이라고 하지는 않고, 900년을 훨씬 넘겼다고 하거나
23) 손영종, 「고구려 건국년대에 대한 재검토」, (1990), 39쪽.
24)“且臣聞高麗秘記云 不及千年 當有八十老將來滅之 自前漢之高麗氏 即有國土 及今九百年矣 李勣年登八十”; 국사편찬
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http://db.history.go.kr/>, 唐會要 「卷九十五 高句麗 乾元[封]三年(668)」, 2018.
7. 1.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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