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9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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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연대 재정립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 연구 신용우
지금처럼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가 불가능했던 당시로서는, 왕위가 부자 세습되는 중국의 관념
에 따라 수성을 국조왕의 아들로 후한서 에 기록하였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궁의 죽음을
기록한 그 기사의 끝부분에 태조대왕의 막내동생이자 차대왕의 동생인 백고(伯固), 즉 신대왕 역시
차대왕이 죽고 왕위에 오르자 “수성(遂成)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이 되었다”고 21) 아들로 기
록한 것을 볼 때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태조대왕이 일곱 살에 즉위하여 94년을 집권하였다는 것을 보면, 국조왕이 누구이며 언제 즉위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태조대왕이 아주 어렸을 때 국조왕은 즉위했고, 태조왕과 국조왕의 치적
과 재위 연수까지 혼합하기 위해서 일곱 살에 즉위했고 94년을 집권했다고 적은 것으로 보인다.
손영종은 삭감된 다섯 명의 왕 중에서 유류, 여률, 막래, 애루 등 네 명은 찾아냈다고 했는데, 나머
지 하나가 태조대왕과 얽힌 국조왕이라는 것이다.
고대국가는 힘의 세력이 나타나면 그 주변 소국들이, 침략이나 병합 등의 방법으로, 제후국이
됨으로써 형성되는 연합국이었다. 따라서 초기의 왕권은 제후들의 입김에 의해 크게 흔들릴 수밖
에 없었고, 적어도 태조대왕 때까지는 힘 있는 제후국들에 의해서 왕권의 승계가 좌우됐다는 것을
얼마든지 엿볼 수 있다.
삼국사기 에 있는 민중왕과 모본왕, 태조대왕의 즉위에 관한 기사를 요약해 보면, “모본왕은
그의 아버지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음으로 삼촌인 민중왕이 왕
위에 올랐다가, 민중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모본왕은 사람됨이 어질지 못하고 포악하여
살해당했는데 그 재위 연수가 불과 6년에 불과하다. 또한 그 아들인 태자는 못나고 어리석어 왕위
를 이어받을 인물이 못 됨으로 태조대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것은 백성들의 환영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태조대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나이가 7세이면서도 남들보
다 재능이 뛰어나 왕으로 삼았으며, 태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22) 고 한다. 이것은 모본왕의 나이가
어려서 즉위하지 못했다는 것과 너무나도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태조대왕의 아버지는 유리왕의 아들인 재사로 당시 계루부족의 대가들이 누릴 수 있던 고추가
였으며 그 어머니는 해씨였다. 모본왕은 수렴청정할 수 있는 어머니가 없었다는 것, 즉 자신의 지
지기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비단 모
본왕 뿐만 아니라 민중왕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민중왕은 조카인 모본왕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으나 불과 4년 만에 죽고 왕위가 다시 모본왕에게 돌아간 점을 본다면 추정해 볼 수 있는 일이
다. 아울러 살해당한 모본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던 국조왕 역시 기록이 없는 까닭에 어떤 절차로
즉위를 했고 왜 축출되었는지 밝힐 수는 없지만, 세력 기반이 미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베이스<http://db.history.go.kr/>, 三國史記 「卷第十五 髙句麗本紀 第三」, 2018. 7. 1. 검색.
21) “遂成死, 子伯固立”;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http://db.history.go.kr/>, 後漢書 「東夷列傳 高
句驪」, 2018. 7. 1. 검색.
2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http://db.history.go.kr/>, 三國史記 「卷第十四 髙句麗本紀 第二」,
三國史記 「卷第十五 髙句麗本紀 第三」, 2018. 7. 1.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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