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8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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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추모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승계하도록 했다는 것 자체가 왕위의 부자 세습을 원칙으로 한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차대왕 자신이 당연히 왕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형이 양위하
지 않으니 반란을 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욕심을 표출한 것이거나, 자신이 당연히 왕위에 올라야
할 이유가 있음을 피력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태조대왕이 순순히 차대왕에게 왕위
를 물려준 것을 보면 차대왕이 왕위에 올라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한서
에서는 궁이 죽고 수성이 아들이라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했는데, 그때는 삼국사기 에서 태조대
왕이 양위를 했다고 기록한 서기 146년에 비해서 25년이나 빠른 서기 121년이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킬까를 고민했다고 할 정도로 중차대한 국가 문제로 다루었으니, 그것은 김부식의 판단처럼
잘못 기록할 문제가 아니다. 삭감된 고구려의 역사를 찾기 위한 것임으로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
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본 연구자의 견해는, 후한서 의 기록이 비록 수성을 아들이라고 틀리게 적었지
만, 그 해에 고구려왕 궁이 죽은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그리고 김부식은 삭감시키고자 하는 왕 중
한 사람인 국조왕을 태조대왕의 묘호와 어울리는 틈을 이용하여 혼합 기록함으로써 고구려의 존
립연대를 삭감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고구려 국조왕의 이름은 궁이었으며 국조왕이 죽고 그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이 태조대왕 어수라는 것이다. 이것은 김부식 자신이 사료로 참고하여 적었던 해동
고기 에도 국조왕이라 쓰고 이름을 궁이라고 했다. 121년에 죽은 것은 국조왕 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국조왕의 죽음은 정상이 아니었고, 태조대왕을 추대하기 위한 모종의 사건이 있었을 것이
다. 그러나 그 사건은 크게 요란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치러진 것으로, 국조왕을 몰아내고 태조
대왕을 즉위시킨 중심에 섰던 것이 바로 차대왕(次大王)으로, 차기(次期) 왕의 자리를 약속받아 이
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잘 사용하지 않는 차대왕이라는 묘호를 썼다는
점에서도 그런 의문이 들게 한다. 그런데 자신이 나이를 먹어도 왕이 죽지 않자, 왕이 되어야 한다
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켜 태조대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할 기
록으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차대왕조에 보면 차대왕 2년 우보 고복장을 죽이는데, 복장이 죽
음에 이르러 탄식하며, “내가 그때 임금의 가까운 신하로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역적을 보고도 묵묵
히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선왕이 내 말을 듣지 않아 이리된 것이 원통하다.” 19) 라고 하였다.
이것은 차대왕이 반란에 의해 왕위를 찬탈한 것임을 증언한 것이다. 또한 차대왕이 반란을 준비하
라고 했을 때, 앞장서서 당연한 일이라고 했던 미유를 즉위 2년 2월에 좌보로 삼은 것이나, 즉위
3년차에 태조대왕의 큰아들 막근을 죽이자 동생 막덕은 스스로 자살한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왕위찬탈에 대한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막근을 죽이자 막덕은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추한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20)
1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http://db.history.go.kr/>, 三國史記 「卷第十五 髙句麗本紀 第三」, 2
018. 7. 1. 검색.
20) 삼국사기 차대왕 3년조에 “여름 4월에 왕이 다른 사람을 시켜서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莫勤)을 죽였다. 그 동생
막덕(莫德)은 화가 연이어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을 맸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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