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7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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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연대 재정립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 연구 신용우
“사라진 5세대의 왕들을 찾는 방식이 삼국사기 의 기록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을 기
반으로 삼았으니, 삼국사기 에 태조대왕이 국조왕이라고도 불렸으며 이름 역시 궁과 함께 어수
라고 불렸다는 기록을 눈여겨 볼일이다. 태조(太祖)는 나라의 기반을 잡은 왕에게 흔히 붙여지는
묘호이므로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불렸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고구려 건국
연대를 늦추기 위해서 써온 방식대로 국조왕을 태조대왕과 혼합하여 기록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
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태조대왕조 마지막에 사관의 기
록임을 전제하며 “ 후한서 에 안제 건광 원년(121)에 고구려왕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즉위하였
다. 현도 태수 요광이 임금이 죽은 것을 계기로 병사를 출동하여 공격하자고 하여 모두가 찬성하였
지만, 상서 진충이 임금이 죽었다고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고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고
후일 잘되는 쪽을 택하는 것이 좋다고 하니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14) 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사관은 이 기록과 함께 해동고기(海東古記) 의 기록을 제시하면서 “‘고구려 국조왕 고궁은 후한
건무 29년에 즉위하였다. 나이가 일곱 살로 국모가 섭정하였다. 효환제 본초 원년에 이르러 왕위
를 사양하여 친동생 수성에게 물려주었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었고 15) 왕위에 있은 지 94년
째였다’라고 하면서, 한서 와 고기의 기록이 서로 다른데 한서 의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닐까” 16)
하는 의문을 남겼다. 후한서 와 해동고기 의 기록 중 어떤 것이 맞는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없
이 사관이 일방적으로 제시해 놓은 것으로 임의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동생인데, 태조대왕에게 두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
하고 왕위에 있다가도 은퇴할 나이인 76세가 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삼국사기 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대왕 94년 7월에 “수성이 가까운 신하들과 사냥
을 끝내고 잔치를 하면서 ‘재사 17) 가 자신이 늙었다고 하여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동
생이 잇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왕이 이미 늙었는데도 양보할 뜻이 없으니 그대는 계획을 세우소
서.’ 미유가 말하기를 ‘동생이 현명하면 형의 뒤를 잇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으니 그대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이에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핑계대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8) 라고 했다. 수성이 태조대왕의 아들도 아니면서 당연히 왕이 될 것을
생각하고, 재사가 아들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을 빗대어 동생인 자신에게 양보하지 않는다고 반란
을 준비하라고 한 것이다.
1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http://db.history.go.kr/>, 三國史記 「卷第十五 髙句麗本紀 第三」, 2
018. 7. 1. 검색.
15) 이때 차대왕의 나이는 76세라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차대왕조에 기록되어 있다.
1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http://db.history.go.kr/>, 三國史記 「卷第十五 髙句麗本紀 第三」, 2
018. 7. 1. 검색.
17) 태조대왕과 차대왕 및 신대왕의 아버지를 지칭하는 것이다.
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http://db.history.go.kr/>, 三國史記 「卷第十五 髙句麗本紀 第三」, 2
018. 7. 1.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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