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5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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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연대 재정립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 연구 신용우
(3) 고구려 현
한 무제가 한사군을 세울 때 ‘고구려현(縣)’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이 문제는 고구려의 일부라
도 점령했기에 고구려현으로 삼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고구려라는 이름을 차용한 것인지
에 대해서는 더 연구 검토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한 무제가 고구려현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그때
고구려라는 나라가 존재했다는 것으로 고구려의 건국은 한사군이 만들어진 기원전 108년 이전이
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삼국사기 사론
삼국사기 사론에 ‘고구려는 진(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 한(기원전 206년~220년) 이
후부터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어’ 12) 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나라는 기원전 9세기 말~8세기
초에 세워진 나라였지만, 그것은 주나라의 한 개 제후국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진나
라는 진시황이 중국대륙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부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 고구려가 함께 존재하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2) 북한 손영종의 기원전 277년론(論)
북한의 손영종 역시 고구려 역사가 삭감되었으므로 건국연대를 소급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1990년 그의 논문이 발표된 이후 북한은 공식적으로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통일
하고 있다. 그는 광개토대왕 능비에 광개토대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12세손이라고 했다는 점을 부각하여 삭감된 5세손을 규명하기 위해서 다음
과 같은 이론을 펼쳤다.
“ 위서 와 북사 에서는 주몽의 아들, 손자, 증손자로서 시려해(여달), 여률, 막래의 이름이 나
오고 그들이 차례로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것이 지적되어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유리
명왕의 이름이 유리이나 다른 이름이 유류라고 하였고, 광개토태왕 능비에는 추모왕의 태자 이름
은 유류라고 되어있다. 이 ‘유류’는 ‘시려’와 음이 통한다. 능비의 기사가 명백한 것임으로 위서
나 북사 의 기록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고 삼국사기 유리왕조에 유류왕 때의 사실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대무신왕 즉위년조에는 대무신왕의 다른 칭호가 대해주류왕
이라고 했으며, 그 이름은 무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에는 그의 딴 이름을 미류
라고 하였다. 광개토태왕 능비에는 대주류왕이 나라의 기초를 이어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무
휼’, ‘미류’는 ‘막래’(ㅁㄹ)와도 음이 가까운 점이 있다. 그리고 북사 에 의하면 막래왕은 부여를
정벌하여 복종시켰다고 했다. 대무신왕 역시 부여와의 전쟁을 치렀다. 대주류왕(막래)과 대무신왕
12) “髙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http://db.history.go.kr/>, 三
國史記 「卷第二十二 髙句麗本紀 第十」, 2018. 7. 1.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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