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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더욱이 장지연은   漢書  출전을 인용한 글에는, 낙랑군 초기에 기자가 다스린 후의 아름다운 풍

                 속과 기자 통치 당시 8조에서 60조로 확장 기록 등은                 30)  조선이 현재의 한반도 위지 여부가 정확하
                 지 않으며,   한서  의 정확한 출전인 “현토와 낙랑은 무제 때 설치한 곳으로 모두 조선·예맥·고구

                 려에 속하는 蠻夷들이다. 은의 왕도가 쇠퇴하자 기자가 은을 버리고 조선으로 달아나 그 백성들을
                 예로써 가르치고 밭을 갈고 누에를 치게 했다. 낙랑조선의 백성들에게는 8조법금을 가르쳤다. 즉,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곡식으로 보상시키도록 하였으며, 도둑질 하면
                 남자는 그 집의 노예로 삼고 여자는 그 집의 종으로 삼았다. 그러자 스스로 속죄하려는 자가 50만

                 이나 되었다.     31)  이상의 논의는 기자가 혼자 동래하였거나 5,000명을 거느리고 왔었도 언어소통
                 이 전혀 되지 않는 조선으로 와서 어떻게 동이족들을 복속시키고 교화과정을 거칠수 있었는지가

                 연구결과 논란이고 의문이 진행중이다.
                   이상의 내용은, 공자가   논어  「자한」, 「공야장」 출전인 “공자가 구이 땅                    32) 에서 살고 싶다고 하

                 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누추한데서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군자가 거처하는데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33) , “공자가 말하기를 ‘도가 행해

                 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고 싶구나’라고 했다.”                     34)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논어  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우리나라가 일찍이 동방예의지국임을 상기시켜 존숭하였다. 이 점은 중화/

                 이적의 차별성을 논하여 변별력을 제시하고, 성현가 군자가 夷狄의 문화를 중화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여기서 ‘구이’와 ‘동이’의 정확한 개념과 범주가 요청된다.                           35)  이러한 기록

                 은 장지연이 기자동래설을 연결하여 지지하는 면모이다.                      36)  더욱이 范曄의   後漢書』 내용이 대표



                 不臣也”의 표점을 ‘乃封, 箕子於朝鮮, 而不臣也’로 해석한 것이 기자동래설과 기자조선의 원의로 둔갑한 것이다. 이 문장
                 은 ‘乃封, 箕子於朝, 鮮而不臣也’라고 해석하면 기자와 조선은 관계가 없으며, ‘乃封, 箕子於朝鮮, 而不臣也’로 해석하더
                 라도 기자는 무왕의 신하가 되는 것을 거부했기에 조선에 봉해지지 않았으므로 넌센스가 된다. 이 기록은 조선에 왕으
                 로 봉했지만 신하로 삼지 않았다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29) 張志淵著.柳正東譯, 『朝鮮儒敎淵源』, 三星美術文化財團, 1981, 8쪽.
                 30) 張志淵著.柳正東譯, 『朝鮮儒敎淵源』, 三星美術文化財團, 1981, 8쪽.
                 31) 班固,   漢書  , 「地理志第八下」, (  四庫  , 249冊), 777쪽, “玄菟 ․樂浪, 武帝時置, 皆朝鮮 ․濊貉 ․句驪蠻夷.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谷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
                 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32) 孔子가 ‘東夷’ 땅에 가서 살고 싶어 했다는 설이 존재하지만,   論語  에는 ‘東夷’가 아닌 ‘九夷’라 되어 있다. ‘東夷’란
                 당시 한민족이 거주하던 한반도를 적시하지만 ‘九夷’는 여러 오랑캐를 총칭한 대명사로 한반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적다.
                 33)   論語  , 「子罕」. “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34)   論語  ,  「公冶長」.  “子曰;  ‘道不行,  乘桴浮于海.’”
                 35) 중국은 화이론에 근거하여 사방의 이적을 東夷, 西戎, 南蠻, 北狄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九夷’는 특정한 어느 한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과 동북쪽에 있는 모든 이적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공자가   논어  에서 ‘九夷’를 말하고
                 있지만 ‘東夷’라는 범주로 말하고 있지 않다.
                 36) 張志淵著.柳正東譯, 『朝鮮儒敎淵源』, 三星美術文化財團, 1981, 9-10쪽. “우리 동방은 오래 전부터 유교를 숭상하
                 는 나라이므로 공자께서 저 기자가 포교하며 도를 널리 행한 것과 같이 하려고 하여 이런 말을 한 것인가 한다. 또한
                 한가지, 우리 동방이 중국의 齊니리나 魯나라와의 거리가 대단히 가까이 인접되어 있어서 조그만 배로도 航行할 수
                 있었으므로 예전부터 상호간의 교통이 심히 빈번하여 기자, 백이, 숙제, 大連․小連과 같은 분들이 왕래한 사실이 기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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