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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기자실기」의 화이론 분석과 기자동래설의 문화공정 대응논리 구축 연구  유성선



                 사상사를 재정립한다는 점에서 기자조선 및 기자동래설의 허와 실을 밝히는 작업은 막중한 책무

                 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율곡전서』의 「기자실기」를 통해 율곡이 화이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기자실기」를 통한 기자동래설의 허와 실을 규명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단군조선과 기자조
                 선 및 기자동래설은 모두 건국신화와의 연접된 관련성에서 시작한다. 이 문제는 왕조의 역사성과

                 조선조 통치론인 성명의리지학의 체계와 더불어 고찰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역사적 사
                 실과 환경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논자는, 이 문제의 정의를, 단군조선은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제시한 것처럼 우리 한민족의 역사성을 대변하며, 한민족에 환란이 있을 때마다 민족주체성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기자조선 및 기자동래설은 특히 12세기 성명의리지학인 유학의

                 수용과 더불어 조선시대에 주자학적 세계관과 명분론으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기자조선 및 기자동래설의 전망은 한국에서는 사실적시 여부의 문제를 신동북공정인 문화공정에

                 명분과 실리로 대응해야 하며, 중국측이 기자조선 및 기자동래설의 문제를 신동북공정인 문화공
                 정의 논리로 왜곡하거나 편입하는 문제를 예의주시해야 할 것이다. 또한 논자는 일천하지만 정리

                 되지 않은 한국고대사상사를 대한학술원 원전강독을 통해서 일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며, 홍
                 을표 박사의 다음과 같은 화두에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전적인 동의 아래 출발하게 되었음을 밝혀

                      5)
                 둔다.


                 Ⅱ. 기자동래설의 문헌적 선행연구



                   박대재의 선행연구 제언은, 중국문헌을 통한 고조선 연구에서 유념해야 할 문제로 중화주의적

                 인 역사인식으로 漢나라 이후에 보이는 ‘기자동래설’, ‘기자조선’ 관련 기록으로, 기자가 동쪽으로

                 조선에 오자 주나라 무왕이 조선에 봉했다는 사마천의 『사기』에 근거한 기록의 예시이다.  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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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래설’ 및 ‘기자조선’은 개항기에서 일제감점기 역사서술에서 이루어지다가  해방공간 이후
                                                   8)
                 에 비판받기에 이른다. 박준형의 논술 처럼, 고조선의 청동기 문화 는 商나라 및 周나라의 청동
                                                                              9)

                 4) ‘武王封箕子于朝鮮’는 기록은, 기자조선과 가장 근접한 시기에 저술된 사마천의   史記  는 어느 곳에도 ‘箕子朝鮮’이
                 란 문구를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世家」38권, <宋微子世家>제8에 “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은 “乃封, 箕子於朝鮮, 而
                 不臣也.”의 표점으로 인한 해석이다. 또한 이 논점은 ‘封箕子朝, 鮮而不臣也.’로 표점을 하면 기자는 武王의 신하가 되는
                 것을 선명하게 거부했기에 조선에 봉해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완전히 허구이자 넌센스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5) 홍을표, 「기자조선에 대한 문헌적 분석」, 『강원사학』25, 강원사학회, 2011, 63쪽. “한반도에 기자조선의 존재여부
                 는 우리 민족이 ‘弘益人間을 치국이념으로 하는 단군의 후손이냐! 아니면 洪範九疇의 교화를 받은 기자의 후예냐!’하는
                 문제로 우리가 ‘고조선의 적자냐! 아니면 중국의 서자냐!’로 갈라지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본다.”
                 6) 朴光用, 「箕子朝鮮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論』6, 서울대 국사학과, 1980.參照.
                 7) 한민족의 얼을 말살하는 정책으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지휘 아래 철저하게 이루어진다.
                 8) 박준형, 「고조선의 성립과 발전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2.參照. “예맥사회에서 가장
                 먼저 정치적으로 성장한 것이 고조선이라고 한다면 그 고조선은 바로 조양지역의 전기비파형동검문화를 기반으로 성
                 장한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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