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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기자실기」의 화이론 분석과 기자동래설의 문화공정 대응논리 구축 연구  유성선



                 적이다.   37)  또한 삼국의 고구려에서는 箕子대왕께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다.                      38)  고구려의 풍속에는

                 우상신을 모시는 사당이 많으며, 농사를 주관하는 영성신, 태양신, 가한신, 기자신을 섬긴다. 나라
                 의 성 동쪽에는 큰 굴이 있는데 신수라 이름하며 항상 10월이 되면 왕이 몸소 그곳에서 제를 지낸

                 다. 39)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기자동래설과 기자를 조선왕에 봉했다는 기록은 당시 유학자들에
                 게 매우 좋은 호재이자 명분론이다. 태조 이성계가 개국 후 명나라와 교섭 후 ‘조선’이라고 국호를

                 정하고 명한 것도 이 기자조선에서 유래한다.                40)  이 때 기자가 전한 중화문화의 요체란 군신의리로
                 대표되는 인륜질서이다. 조선으로 건너온 기자의 행적은 군신의리로 상징되는 중화문화를 조선에

                 전해 준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한다.             41)  심경호는, 다산 정약용은 『팔도연혁총서』에서 강원도를 영
                 서와 영동으로 나누고, 강원도 전체가 본래 기자조선의 땅임을 전거하고 있다.                             42)  이상의 전거는

                 중국학계의 신동북공정인 문화공정의 논리와 함께 연구를 진행할 일이다.                            43)  사실 단군조선과 기
                 자조선 및 기자동래설은 모두 한민족의 건국신화와 관련하여 출발한다. 이 문제는 왕조의 역사성

                 과 조선조 통치론이였던 성리학의 체계와 더불어 고찰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역사적 전
                 변과 환경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44)







                 으로 확실하게 나타나 있었으니, 공자가 살고자 한 것은 이러한 여건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공자로 하여금 과연 바다를
                 건너 기자와 같이 동으로 와서, 교화를 우리 동방에 傳布하게 하였다면 우리 지역이 공자교의 근거의 나라가 되어서
                 천하에 더욱 널리 알려졌을는지 알 수 있겠는가.”
                 37) 范曄,   後漢書  , 「東夷列傳第七十五」, (  四庫  , 253冊), 647-648쪽. “論曰, 昔箕子違衰殷之運, 避地朝鮮, 始其國俗
                 未有聞也. 及施八條之約, 使人知禁, 遂乃邑無淫盜, 門不夜扃, 一]回頑薄之俗, 就寬略之法, 行數百千年, 故東夷通以柔謹
                 為風, 異乎三方者也. 苟政之所暢, 則道義存焉, 仲尼懷憤, 以為九夷可居, 或疑其陋.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亦徒有以焉
                 爾.”
                 38) 『三國史記』卷32, 「祭祀」. “唐書云, 高句麗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國左有大穴曰神隧, 每十月王皆自祭.”
                 39) 『舊唐書』, 「高麗傳」. “其俗多淫祠, 事靈星神, 日神、可汗神、箕子神. 國城東有大穴, 名神隧, 皆以十月, 王自祭之.”
                 40) 鄭道傳, 『三峰集』, 卷7, 「朝鮮經國典」. “海東之國, 不一其號. 爲朝鮮者三, 曰檀君曰箕子曰衛滿. 若朴氏昔氏金氏相繼
                 稱新羅。溫祚稱百濟於前, 甄萱稱百濟於後. 又高朱蒙稱高句麗, 弓裔稱後高麗, 王氏代弓裔, 仍襲高麗之號. 皆竊據一隅, 不
                 受中國之命, 自立名號, 互相侵奪, 雖有所稱, 何足取哉. 惟箕子受周武之命, 封朝鮮侯. 今天子命曰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
                 矣, 可以本其名而祖之, 體天牧民, 永昌後嗣, 蓋以武王之命箕子者, 命殿下, 名旣正矣. 言旣順矣, 箕子陳武王以洪範, 推衍其
                 義, 作八條之敎, 施之國中, 政化盛行, 風俗至美. 朝鮮之名, 聞於天下後世者如此. 今旣襲朝鮮之美號, 則箕子之善政亦在所
                 當講焉. 嗚呼. 天子之德無愧於周武, 子哉. 將見洪範之學, 八條之敎, 復行於今日也. 孔子曰, 吾其爲東周乎. 豈欺我哉.”
                 41) 禹景燮, 「宋時烈의 華夷論과 朝鮮中華主義의 成立」, 『震檀學報』(101), 震檀學會, 2006, 277쪽. 再引用. 『宋子大全』,
                 卷131, 「雜錄」. “我東本箕子之國, 箕子所行八條, 皆本於洪範, 則大法之行, 實與周家同時矣. 孔子之欲居, 亦豈以是也耶!”
                 42) 沈慶昊, 『茶山과 春川』, 江原大出版部, 1995.參照.
                 43) 조법종, 「2000년대 이후 중국학계의 고조선 연구」, 『선사와 고대』54, 한국고대학회, 2017, 34쪽. “중국학계는
                 箕子東來를 역사적 사실로 재구성하고 이와 연결된 箕子朝鮮의 존재를 한반도에서 구하고 衛滿의 출자를 중국계로 연
                 계시켜 箕子-衛滿-漢郡縣으로 연결되는 중국사적 범주의 고조선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또한 三韓에 대해서도 殷商의
                 遺民이 한반도로 망명하여 성립시킨 역사로 연결하여 결국 “고조선-삼한” 전역을 중국사로 파악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44) 여기서 문제로 제기되는 지역성의 문제는 기자조선의 수도가 평안도 평양(平壤)이 아니라 중국 산서성 임분현의
                 평양(平陽)이라는 점의 사실 여부이다.(한자 자체가 다르다) 중국사에서 은나라가 망한 것은 기원전 11세기(기원전
                 1027년경)이다. 이 시대에 기자조선의 왕조의 존재여부는 추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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