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P. 14

동북공정 분과


                 Ⅳ. 기자동래설의 문화공정 대응논리



                   사실 기자동래설은 단군 이래 시대 상황의 전변에 따라 발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이론에 입각

                 한 중국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동이족을 교화시켰다고 주장했을 것이고, 특히 통
                 지론으로 작동한 유교의 사대외교에 기인된 것이다. 이러한 기자동래설의 신동북공정인 문화공정

                 은 중국과 일본 뿐만 아니라 대만 등에서도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5)  또한 중국의 국가 프로
                 젝트인 ‘동북공정’은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역사왜곡이자 고구려사 등을 중국 역사로 편입

                 하려는 시도는 일관되고 지속적인 물량공세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46)
                   「기자실기」는 병진 8년(1580년) 율곡 이이 45세에 편찬하였다. 이 실기는 윤두수(1533-1601)

                 의 「기자지」를 바로잡고 요약한 것이다. 윤두수의 「기자지」는 그가 선조 10년(1577년)에 사은사
                 로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의 사인들이 그에게 기자가 한 일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했음에도 적절하
                 게 대답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윤두수가 귀국하여 한 책자를 만들어 그것을 「기자지」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이 몹시 정미롭지 못하였다. 이에 율곡은, “단군이 처음으로 나왔으나

                 그 문헌을 상고할 수 없고, 오직 기자가 이 땅에 와서 백성을 천시하지 않고 잘 기르고 부지런히
                 가르쳐 퇴결의 풍속을 변화시켜 제노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하여, 드디어 한 책자를 만드니
                 대략 그 시종을 서술하여 학자들이 고증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47)  여기서 윤두수가 명나라에서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소략했으며, 율곡이 단군에 관하 정확한 기록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치우

                 친 이론이지만, 율곡은 분명히 뚜렷한 역사의식과 민족주체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48)  율곡은 기자
                 동래설의 근거로 기자가 무왕을 위해 홍범구주를 전한 것은 중국에서이지만 그 구체적인 실천과
                 통치는 한반도 조선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49)


                 45) 김유리, 「최근 대만 역사교과서의 한국사 인식 변화-101과강 『선수역사(選修歷史)』와 108과강 『역사(歷史)2』 비
                 교 분석」, 『동북아역사논총』71, 동북아역사재단, 2021, 395-3969쪽. “‘㈠조선’에서는 “조선반도와 중국의 문화교
                 류는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나라 유민이 조선으로 이동하여 기씨왕조를 건립했다고 전해진다.....『선수역사』
                 는 세부항목의 제목인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본문에서는 ‘조선’으로 ‘조선반도’를 지칭하거나 ‘조선반도 지역에
                 성립된 역대 왕조’를 통칭했다. 즉, ‘조선’에 기씨조선, 삼국, 고려, 조선을 모두 포함했으며, 조선왕조는 ‘이씨조선’이
                 나 ‘이조’로 지칭했다.”
                 46) 최광식, 「‘東北工程’의 배경과 내용 및 대응방안-고구려사 연구동향과 문제점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제
                 33권, 한국고대사학회, 2004, 5-21쪽.參照.
                 47) 『栗谷全書』2, 卷34, 312쪽 上-下. “先是, 尹公斗壽朝天, 中朝人問箕子事迹, 尹公不能對. 旣還, 成一書, 名曰「箕子
                 志」. 猶未甚精. 先生以爲我東有民, 不後中國, 未聞睿智有作, 以盡君師不責. 檀君首出, 文獻罔稽, 惟箕子來臨, 不鄙夷其民,
                 養之厚而敎之勤, 變魋結之俗, 成齊魯之邦. 蓋箕子旣陳大法於武王, 道明華夏, 而推其緖餘, 化洽于三韓, 苟非元聖, 烏能如
                 此哉? 然今人鮮能知之, 被人猝問, 未有能言者. 蓋由羣書散漫, 學之不博也. 遂錄成一篇, 略敍始終, 以便學者考徵焉.”
                 48) 宋錫球「栗谷思想과 民族主體性」, 『栗谷學報』(15호), 栗谷學會, 2000, 18쪽.
                 49) 『栗谷全書』1, 卷14, 290-291쪽 下-上. “箕子旣爲武王傳道, 不肯仕, 武王亦不敢强. 箕子乃避中國, 東入朝鮮, 中國人
                 隨之者五千, 詩書禮樂醫巫陰陽卜筮之流, 百工技藝, 皆從焉. 武王聞之, 因封以朝鮮, 都平壤. 初至言語不通, 譯而知之, 敎其
                 民以禮義農蠶織作, 經畫井田之制, 設禁八條. 其略, 相殺償以命,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爲其家奴, 女爲婢, 欲自贖者, 人
                 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娶無所售. 是以, 其民不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浮, 辟其田,野都邑, 飮食以籩豆, 崇信
                 讓篤儒術, 釀成中國之風敎, 以勿尙兵鬪, 以德服强暴, 鄰國皆慕其義歸附, 衣冠制度, 悉同乎中國.”



                 14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