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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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다수 민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이 역사적으로 자신들을 존중하고 원심력을 유지하려는 세계관적 기
능을 오늘까지 수행하고 작동해왔다. 논자는, 화이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신동북공정인 문
화공정의 논리처럼 왜곡되거나 전변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중화와 이적의 구분을 우경섭은 3가지로 ① 지역적 개념, ② 종족적 개념, ③ 문화적 개념을 제시
하고 있다. 18) 이 중 3가지 요소중 중심이 되는 기준은 문화적 개념에 있다. 중국 측의 신동북공정
인 문화공정 역시 문화적 개념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박광용은, 기자조선 연구는 ‘기자동래설’ 및 ‘기자조선’의 위치문제와 더불어 2가지 경향을 파
악한다. ① 문헌 비판 및 당시 상황을 통하여 기자동래설을 부정하고 기자조선을 허구로 보는 입
장, ② 현재 기자의 동래를 인정하되, 단군조선과 같이 취급하여 ‘기자족’ 내지 ‘기자국’의 이동으
로 보는 견해이다. 19) 19세기 말~20세기 초 율곡 이이의 「기자실기」는 이른바 ‘기자동래설’의 연
원으로 시작된다. 20)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이 이 논의의 시발점이다. 즉, 장지연은 ‘기자동래
설’을 조선이 유교의 종주국 또는 舊邦임을 주장하게 된 이유이다.
Ⅲ. 기자동래설의 허와 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단군조선보다도 기자동래설을 중시하였다. 사실 유교를 통치론으로
작동한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의 독서순차를 보더라도 공자 이래의 유학 텍스트에 전심전력을 기
울였다. 율곡의 독서순차가 일반적인 사례로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1) 이미 조선에서는
공자 이전 당우삼대의 도가 전해져 중국의 대중화에 이어진 소중화라는 자부심을 지녔다. 이 근
거는 논어 「미자」편이 출전이다. 22) 또한 사마천의 사기열전 23) 「송미자세가」에는 공자의 말
을 인용하여 성인 3인의 일화를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사마천은, 기자는 주왕의 친척이자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자, 탄식하여 말하기를 “주왕이 이미 상아 젓가락을 사용한 이상 틀림없이
18) 禹景燮, 「宋時烈의 華夷論과 朝鮮中華主義의 成立」, 『震檀學報』(101), 震檀學會, 2006, 260쪽.
19) 朴光用, 「箕子朝鮮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論』6, 서울대 국사학과, 1980. 165-166쪽.
20) 『율곡전서』에 나타난 율곡의 기자에 관한 기록은 「次王天使箕子廟賦韻」, 「箕子殿」, 「箕子廟 二首」, 「謁箕子墓」, 「渡
大同江」, 「代白參贊論時事疏」, 「萬言封事」 등으로 그 중 「箕子實記」가 비교적 전문적이고 상세한 기록이다.
21) 『栗谷全書』2, 卷27, 「擊蒙要訣」, 84-85쪽 下-上. *栗谷의 讀書順序: ①『小學』 ②『大學』 ③ 『論語』 ④ 『孟子』 ⑤
『中庸』 ⑥『詩經』 ⑦『禮經』⑧『書經』 ⑨『周易』 ⑩ 『春秋』 ⑪ 『近思錄』, 『家禮』,『心經』, 『二程全書』,『朱子大全』,
『朱子語類』.
22) “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
23) 홍을표, 「기자조선에 대한 문헌적 분석」, 『강원사학』25, 강원사학회, 2011, 72쪽. “만일 기자동래설에 근거하여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면 900여년 이후 작성한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서 기자에 대해 세밀하고 면밀하게
작성했어야 한다. 여기에는 기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조선왕 위만을 서두로 언급하고 있다. 이로보아 기자와
조선이 무관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史記 의 기록을 검토해 본 결과 기자의 조선책봉이나 동래설에 대한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왕이 죽고 주공 단이 섭정할 때까지도 기자는 주나라 땅에서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천으로부터 350년 뒤에 鱼豢이 쓴 魏略 의 기자동래설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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