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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기자실기」의 화이론 분석과 기자동래설의 문화공정 대응논리 구축 연구  유성선



                 해석한 것도 비밀전수를 통해서였다.              15)  따라서 논자는 기자조선 및 기자동래설의 근거와 출전이

                 불분명하고, 중국의 소수민족 동화이론 등 현재적 상황이 노정되어 있으며, 본 논문을 통해서 신동
                 북공정인 문화공정의 대응논리를 구축할 때임을 밝혀둔다.                       16)  모든 사상과 문화는 시대적 흐름과

                 파고에 그 본체를 싣는다. 이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사상의 본질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한반도와
                 중국의 관계는 5천년 역사에 노정되어 있다. 유교를 통치론으로 작동하던 조선시대의 율곡 이이는

                 중국을 어떻게 보았을까?
                   논자는, 화이론은 현재진행형이며, 신동북공정인 문화공정의 논리처럼 전변될 수 있음을 제언

                 하는 바이다. 사실 기자가 성인이자 조선으로 동래하여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사마천 『사
                 기』 등의 기록을 통한 출전으로 보아 한반도상의 기자조선을 통치했는지의 역사적 사실 여부가 관

                 건이자 논란이다.       17)
                   우리 역사의 단군조선과 기자동래설 및 기자조선은 모두 건국신화와 관련하여 시작한다. 사실,

                 단군조선은 고려시대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진술한 것처럼 우리 한민족의 역사성을 대변하며,
                 특히 한민족에 환란과 고난이 있을 때마다 민족주체성으로 등장하는 화두였다. 이에 반해 기자동

                 래설과 기자조선은 12세기 유학(성리학) 수용과 더불어 주자학적 세계관 및 명분론으로 조선시대
                 에서 작동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기자조선과 기자동래설의 전망은 대한민국에서는 사실여부의 문

                 제를 역사적 문헌에 입각하여 명분과 실리로 대응해야 하고, 중국측이 ‘기자동래설’ 및 ‘기자조선’
                 의 문제를 신동북공정인 문화공정의 논리로 편입하는 문제를 예의주시하고 대응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율곡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공자의   논어  와 사마천의 『사기』등에 관한 구절을 인용
                 하여 조선이 일찍이 동방예의지국임을 상기시키며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이 점은 중화/ 이적의

                 차별성을 논하여 변별력을 제시하고, 군자와 성인이 이적의 문화를 중화로 변화할 수 있음을 열어
                 놓고 있었다. 또한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만 규정한다면 「기자실기」에 근거한 율곡의 화이론은 뚜

                 렷한 역사의식과 민족주체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이론의 사상적 근거는 바로 공자가 말한 『논어』의 가르침에서 시작한다. 유교는 성인과 군자

                 의 가르침이자, 중국의 세계관인 근본원리라고 중국인들은 사유하고 있었다. 이 화이관은 소수와

                 화학회), 2015, 41-71쪽.參照.
                 15) 유성선.이난숙共譯, 「율곡의 『순언』: 유학자의 노자 『도덕경』 이해」, 景仁文化社, 2015.參照./ 유성선, 「『醇言』의
                 無爲 境界: 율곡의 노자철학 이해」, 『한중인문학연구』, 한중인문학회, 2007, 193-210쪽.參照.
                 16) 홍을표, 「기자조선에 대한 문헌적 분석」, 『강원사학』25, 강원사학회, 2011, 63쪽. “우리나라는 요동지역을 중심
                 으로 웅거했던 고조선을 시작으로, 광활한 만주일대를 호령했던 고구려와 해상세력을 확장했던 백제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병존해 왔지만,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로부터 점차 일방적인 상하관계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易姓革命으로 政權의 명분이 없었던 조선왕조는 명과의 조공책봉관계를 통하여 입지를
                 다지고자 기자동래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고 보인다.”
                 17) 조법종, 「2000년대 이후 중국학계의 고조선 연구」, 『선사와 고대』54, 한국고대학회, 2017, 34쪽. “箕子東來의
                 경우 箕子가 동래했다는 기원전 11세기경에 정작 朝鮮명칭이 史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복하기 위해 明夷,
                 嵎夷 및 扶桑十日 신화와 연결시켜 해결하려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핵심적인 명칭인 明夷해석과 관련하여 자체
                 연구자 사이에서도 심각한 문제제기 및 반론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리의 취약성이 발견되며 조선의 의미부분만
                 을 부각시켜 논의를 확대 재생산하는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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