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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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기자실기」의 화이론 분석과 기자동래설의 문화공정 대응논리 구축 연구 유성선
일제의 식민사관에서는 조선사편수회 지휘 아래 단군을 왜곡하고 한국의 민족성과 자주성을 부
정하는데 이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이 이와같이 정리한 것은 중국과 한국의 관계가 패
도적인 사대주의의의 종속관계가 아니라 王道의 禮의 관계임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50) 이유진은,
이러한 서술을 3가지 주장으로 요약하는데, ①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예양에 입각한 것이며, ②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전통은 동일하고, ③ 기자가 전한 홍범구주의 구체적인 실천은 조선에서 이
루어졌다는 사실이다. 51)
결국 율곡은, 기자가 다스리고 덕을 베푼 조선의 상황을 52) 칭송한다. 53) 또한 율곡은 기자의 고
사를 정리하고 있다. 54) 이러한 율곡의 기자 칭송은 15세기에 기자조선의 기록이 통일화되는 경향
이 나타나는데, ‘武王封箕子于朝鮮而不臣也’ 55) 으로 대표되는 사대적 외교질서의 인정과 동시에 단
군과 기자가 동등하게 존중되고 또 朝周는 일체 거론되지 않는 등의 국가자주성을 지키려는 면모
가 복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56) 조법종은, 기자조선은 중국문화를 토대로 건립된 지방정권이지만
그것을 입증하기 위한 논지 전개에 있어서 초기 중심지 문제 강역문제와 관련된 요서설 이동설과
는 달리 평양설을 취하면서 기자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제한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의 문
화로 보편적으로 인식되어온 비파형동검이나 고인돌문화를 북방 초원지대문화의 영향으로 취급
하는 등 고고학 상식에 어긋나는 추론을 거듭하고 있다. 57)
조선시대 율곡을 비롯한 유학자들에게 성현인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은 매우 좋은 명분
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개국 후 명나라와 교섭을 통하여 ‘조선’이라고 국호를 명한 것도 이 기자조
선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문제는 왕조의 역사성과 조선조 통치론이였던 성리학적 시스템의 체계
와 더불어 고찰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의는 역사적 환경과 변화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50) 宋錫球, 「栗谷思想과 民族主體性」, 『栗谷學報』(15호), 栗谷學會, 2000, 20쪽.
51) 이유진, 「栗谷 箕子實記의 硏究」, 『栗谷思想硏究』(第8輯), 栗谷學會, 2004, 38쪽.
52) 『栗谷全書』1, 卷14, 291쪽 上. “朝鮮被仁賢之化, 爲詩書禮樂之邦, 朝野無事, 人民懽悅, 以大同江比黃河, 作歌以頌其
德.”
53) 『栗谷全書』1, 卷14, 291쪽 下. “猗歟大師! 運遭明夷. 內貞而晦, 制義隨時. 被髮操音, 惟天我知. 宗國旣淪, 嗚呼曷歸?
法授蒼姬, 身莅靑㙨. 誕闢土宇, 樂浪作京. 鰈域長夜, 肇照日星. 禁設八條, 文宣禮樂. 江淸大同, 山重太白. 子孫繩繩, 千祀
是卜. 五世不斬, 迄受遺澤. 報祀仁辟, 極天如昨.”
54) 『栗谷全書』1, 卷14, 291쪽 下. “謹按, 天生蒸民, 必降聖賢以主之, 輔相化育, 宣朗人文, 以遂其生, 以立其敎. 伏羲以
下, 迄于三王, 代天開物, 故命之以(之以下, 疑有闕.)我東有民, 想不後中國, 未聞睿智有作, 以盡君師之責. 檀君首出, 文獻
罔稽. 恭惟箕子, 誕莅朝鮮, 不鄙夷其民, 養之厚而敎之勤, 變魋結之俗, 成齊魯之邦, 民到于今, 受其賜, 禮變之習, 濟濟不
替. 至於夫子, 有浮海欲居之志, 則微禹之嘆, 沒世愈深矣. 大哉箕子! 旣陳洪範於武王, 道明于華夏, 推其緖餘, 化洽于三韓,
子孫傳祚千有餘年, 後辟景仰, 若揭日月, 崇德報功, 世篤其典, 苟非元聖, 烏能致此? 嗚呼盛矣哉!”
55) ‘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의 문법적 해석에 따라 기자가 조선으로 왔거나 기자동래설은 전혀 무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乃封, 箕子於朝, 鮮而不臣也.’가 마땅할 것이다. 문헌의 기록상 무왕은 성군이며 기자는 현인인데 이러한 정황
은 기자동래설을 작성하고 있는 魏志 등의 기록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56) 朴光用, 「箕子朝鮮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論』6, 293-294쪽. “미풍양속 등의 기자문화유풍을 강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유교이념에 의해 사회재편성을 달성하겠다는 국가적 차원의 문화운동에 의해서 정책적으로 취급되었음
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정통․명분론의 입장에서 취급되지는 않고 있다.”
57) 조법종, 「2000년대 이후 중국학계의 고조선연구」, 『선사와 고대』54, 한국고대학회, 2017,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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