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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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분과 1
조선에서 관할한다는 외교적인 쾌거를 달성하였다. 33) 그 결과 명으로부터 11처 지역의 여진 귀속
문제를 승인받았다. 34) 이런 역사적인 사례로 거란의 소송녕과 담판을 지은 서희가 돌려받은 강동
육주의 역사적 사실이 있다.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적인 교섭에서 항상 동북쪽의 영토를 주장할 수
있는 기준은 역사 지리적으로 공험진과 선춘령이었다. 그러한 공험진과 선춘령 비는 세종 때에도
육진개척의 지표가 되었다. 세종은 14333년 고려 시대의 길주는 어디인가 조사하고 보고하라고
했다. 세종 21년에 세종의 명을 받은 최치운이 북경에 파견하여 명과의 교섭에서 공험진 이남을 조
선에서 관할해야 한다는 교섭 활동을 했다. 세종은 명나라의 고황제가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경계’
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공험진 이남에 대한 역사 연고권을 명나라에 강하게 주장한 군왕
이었다. 명나라로부터 받은 공험진 이남의 관할권을 확실히 하고자 세종 21년(1439)년에 김종서로
하여금 공험진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도록 지시를 했다. 35) 세종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고려사』·
『고려사절요』·『세종실록』 「지리지」·『용비어천가』·『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자료에서 유독 동북
9성 특히 공험진, 선춘령의 위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36) 공험진과 선춘령의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를 비롯한 관찬사 뿐만 아니라 유학자들의 저서에서도 나
타나고 있다. 『성호사설』을 지은 이익(1681~1763)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윤관의 비는 선춘령(先春嶺)에 있는데 두만강(豆滿江) 북쪽으로 7백 리가 되는 곳에 있다. 그 비
에 새긴 글을 호인(胡人)이 긁어버리기는 했으나 옛날 흔적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윤
관이 육성(六城)을 설치하고 공험진(公嶮鎭)을 개설하였는데, 고령진(高嶺鎭)으로부터 두만강
을 건너 소하강(蘇下江) 가에 이르면 옛 터전이 그대로 있으니 곧 선춘령의 동남쪽이요 백두산
의 동북쪽이다. 그는 이만치 국경을 멀리 개척해 놓았는데, 지금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은
김종서(金宗瑞)로부터 시작되었다. 37)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고구려와 고려의 영토를 비교하는 내용이 나온다.
고려 태조는, 신라에게 항복을 받고 백제를 멸한 고구려의 땅에서 흥했는데, 도읍을 개경으로 하
였다. 서북은 당나라 이후로 압록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서북은 고
구려의 지역에 못 미쳤으나, 동북은 고구려 영토보다 더 하였다. 38)
33) 이상태, (2016), 66~73쪽
34) 이인철, (2017), 271쪽.
35) 이상태, (2016), 70~71쪽
36) 이인철, (2017), 273쪽.
37) 이익, 『성호사설』 제 2권, 「천지문」, 윤관비. 尹瓘碑在先春嶺豆滿江北七百里其所勒書雖為胡人剝去而舊跡尚猶未盡
泯也瓘置六城設公嶮鎭自髙嶺鎭渡豆滿江至蘇下江濵有古基即先春嶺之東南白頭山之東北其拓界之逺如此今以豆滿為界
者自金宗瑞始也
38) 『고려사』 「지리지」 서문: 高麗太祖 興於高句麗之地 降新羅滅百濟 定都開京. 其四履 西北 自唐以來 以鴨綠爲限 而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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