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2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P. 72
환단고기 분과 1
들의 ‘함흥평야설’이 대표적인 식민사관으로 생긴 반도 사관에 의한 잘못된 왜곡으로 생긴 것이라
고 보았다. 대일 항쟁기 시절 동북 9성에 대한 연구는 근본적으로 식민사관에서 출발하였기 때문
에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보았다. 21) 윤여덕은 정약용과 한백겸과 같은 학자들이 얘기한 역사 지리
적인 한계는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 없는 그 당시의 역사 정보의 한계에서 왔다고 보았다. 실학의
관점에서 역사를 고증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우리나라 관역을 축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은
정보가 폐쇄되면서 정보를 알지 못함으로 생긴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22)
공험진, 선춘령의 ‘길주이남설’, ‘함흥 평야설’의 특징은 원자료에 해당하는 『고려사』나 『조선
왕조실록』의 고증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학자들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같은 여말 선초의
근본 사료를 부정하고 자료에서 제외시키는 의도적인 과오를 저지르고 있었다. 또한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에 입각해서 공험진과 선춘령비를 부정하였다. 23) 서거정(1420~1488)이 쓴 『동국여지
승람』에서도 서북으로는 압록강, 동북쪽으로는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고, 서북쪽으로는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지만 동북은 고구려의 영역보다 더 넓혔으며, 두만강이 아니라 선춘령이 고려의 동북
쪽 국경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조선이 건국할 당시에 만주 지역의 영토를 명나라로
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고 했다. 여진족 관할권을 명나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것
이다. 24) 이것은 역사 연고권이 인정받으면서 여진족을 관할할 수 있는 지역을 돌려받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연고권이 인정받으면 역사분쟁이 영토전쟁으로 이어질 때 대
외적인 명분으로 활용될 수가 있다. 조선시대 때, 15세기에 제작된 팔도지도에서는 공험진과 선춘
령 비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1480년에 제작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라고 하는 『조선팔도지
도』에서는 함경도 회령에서 선춘령을 거쳐서 가는 길이 붉은 선으로 표시되는데, 공험진이 회령에
서 영고탑으로 가는 길 가운데에 있다고 표시하였다고 한다. 25)
복기대는 현재 통용되고 있는 조선의 전기 국경선은 현재 두만강을 한계로 하는데 이것은 1907
년, 1909년에 확정이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연변 일대의 해란강까지 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이
다. 일본이 1905년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간도 협정을 맺은 뒤에 현재의 국경선이 이루
어졌고 함경도의 경계선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함경도는 그 전에 함길도인데 지금의 두만강이 경
계선이 아니고 그 이북까지가 원래의 함길도의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 지역에 경원부가 있는데
경원부는 조선의 성지이다. 경원부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뜻으로 경원(慶源;경사스러운 근원
처)이라고 했다. 그 것은 태조 이성계 고조부인 목조의 릉인 ‘덕릉’과 고조모의 릉인 ‘안릉’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태조는 아들 방원을 보내 덕릉과 안릉을 짓게하고 경원부라 호칭을 했다. 26) 『세
21) 이인철,(2017), 254~255쪽.
22) 윤여덕, 「수빈강 선춘령에 서린 천년한」, 『북한』, (2008), 153쪽.
23) 이인철,(2017), 255쪽.
24) 이상태, 「선춘령과 공험진의 위치 고찰에 관한 연구」, 『學林』제37집, (2016), 63쪽.
25) 이상태, (2016), 73쪽.
26) 복기대, 「경원부의 위치에 관한 소론」, 인문과학연구, (2021), 177~184쪽.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