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1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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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사료로 살펴본 살수, 선춘령, 공험진의 위치 고찰 신민식
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요동성과 압록수를 지나 450리를 가야 살수가 나오고 살수를 지나
최소 30리를 가야 평양성에 도착할 수 있다고 보았다. 16) 고광진은 살수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중요
한 기준이 되는 압록수(鴨綠水)에 대한 논문으로 사료에서 나온 압록수가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의
‘압록강(鴨綠江)’이 아니라고 했다. 남의현은 『고려도경』의 사료를 바탕으로 현재 압록강은 ‘강을
건널 수 있는 큰 배가 정박되어 있고 배로 건넌다’라는 기록의 강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한반도의
압록강은 수심의 깊이와 유량의 변화가 심하고 자갈이 많아서 거선을 타고 건넜다는 기록이 없다
고 했다. 17) 북한의 압록강은 배가 아니더라도 현재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이 있다. 남의현은
살수는 만주에 있다고 보았으며, 수. 당시대의 요서지역에 요수와 요동성이 있다고 했다. 18)
복기대는 살수가 현재 차이나 요녕성 무순시에서 시작하여 서남으로 내려가는 물줄기인 혼하
(渾河)라고 하였다. 현재 혼하라는 상류를 명나라 시대 기록에서는 살수라고 기록하고 구체적으로
수나라 장수 신세웅이 전사한 곳이라고 명확히 지적하면서 혼하를 살수로 비정한다. 19)
2. 선춘령, 공험진의 ‘길주 이남설’, ‘함흥 평야설’과 ‘두만강 이북설’
선춘령과 공험진의 위치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은 ‘길주 이남
설’을 주장하였다. 길주 이남설을 주장한 유학자들은 대표적으로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를 비롯
해서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신경준의 『강계고』,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지선의 『해동역사』, 정
약용의 『아방강역고』, 윤정기의 『동한록』,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동북 9성을 한반도 동북부
두만강 이남의 길주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1615년에 『동국지리지』에서 ‘길주 이남설’을 처음 제
기한 한백겸이 주장한 근거는 함경남도 마운령에서 발견된 석추구기와 돌기둥을 윤관이 세웠던
선춘령 정계비로 인식하면서 발생된 모순이었다. 한백겸이 제시한 선춘령 정계비로 알려졌던 비
석이 사실은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 비라고 최남선이 1929년 밝혀냈다. 20)
한백겸의 주장이 처음부터 잘못된 주장이었다는 것을 후대에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일제 대일
항쟁기 시절에 일본 학자들은 ‘함흥 평야설’을 주장하면서 길주 이남보다 더 아래쪽이라고 주장했
다. 이케우치 히로시(池内宏)는 주장하기를 동북 9성의 지역이 길주보다 아래인 함관령 이남 지역
이고, 또한 크게 보면 지금의 함흥평야에 해당 된다고 보았다. 또 이나와 이에이키치(稻葉岩吉)도
‘함흥 평야설’에 동조하였으며, ‘두만강 이북 입비운운’은 와전이라고 하였다. 이인철은 일본학자
16) 김진경, 「고대 요수의 위치 비정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천안, 2012), 207~2
08쪽.
17) 남의현, 「중국의 중조변계사를 통해 본 한중 국경문제」, 『인문과학연구』 57,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34쪽.
18) 남의현, (2018). 47~48쪽.
19) 복기대,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선도문화』 25권, (2018), 257~258쪽.
20) 이인철,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연구」, 『선도문화』 23권, (2017), 250~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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