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9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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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사료로 살펴본 살수, 선춘령, 공험진의 위치 고찰 신민식
Ⅱ. 선행연구
1. 살수 청천강설과 살수 혼하설
김부식은 살수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삼국사기에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했던
5)
살수 위치에 대해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 사이에서 청천강이라고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이익
(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안정복(1712~1791)은 『동사강목』에서 살수를 안주 지금의 청
천강으로 보았다. 한치윤(1765~1814)도 『해동역사』에서 정약용(1762~1836)은 『아방강역고』
에서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이다”라고 하였다. 이만응은 『홍재전서』「경사강의」에서 정조
(1752~1899)에게 청천강의 다른 이름이 살수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살수에 대한 기사
가 15회 정도 나오는데 『태종실록』에 1회 나오고 『세종실록』에서 4회 나오고 『성종실록』에 5회
『중종실록』에 3회, 명종때 1회 『순조실록』에 1회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살수의 최초기록
은 『태종실록』에서 나온다. 『태종실록』에 조사의 반역사건이 나온다. 이는 조선 전기 문신이고 안
변 부사인 조사의가 태종에게 학대받은 신덕왕후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참형을 받은 사건이다.
태종실록의 조선 왕조 실록, 조사의(趙思義) 반역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1월 27일 병오(丙午), 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조사의趙思義의 군사가 안주安州에 도착하고, 밤에 궤멸潰滅되었다. 조사의 군사가 살수薩水
주변에 주둔하였는데, 밤에 살수를 건너다가 얼음이 꺼져서 죽은 사람이 수백 명이 되면서 저절
로 궤멸되었다. /思義軍至安州夜潰。 思義軍屯于薩水邊, 夜自潰渡水, 氷陷而死者數百餘人。
살수에 대한 후대 기록으로 『세종실록』에도 나오는데 “평양의 패강과 안주의 살수가 뱃길로 서
로 통한다고 하고, 수나라 병사 백만 대군이 고기가 된 곳이 즉 안주이고 이곳을 살수”라 말한다고
했다. 평양의 패강과 안주의 살수가 서로 배편으로 연결이 된다[漕可通]는 『세종실록』의 내용은
6)
향후 평양의 패강과 살수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이다. 『태종실록』에 안주가 살수라고만 했던
7)
기록이 『성종실록』에서는 안주성의 서쪽은 ‘청천강’인데 일명 살수라고 부른다고 했다. 또한 수나
라 양제 십만의 병사가 살수에서 패했는데 즉 지금의 청천강이라고 했다. 태종 때는 청천강이라
8)
5) 『三國史記』「雜志 地理四」“三國有名未詳地分- 삼국에서 이름만 있고 지역을 아직 상세히 구분하지 못함”
6) 『세종실록』 載於阿郞浦, 則平壤 浿江、安州薩水漕可通也...古人謂隋兵百萬化爲魚, 卽安州薩水之謂也
7) 평양의 패강이 대동강으로 안주의 살수를 청천강으로 일제 강점기때 구체적으로 비정하고 그 학설을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대동강과 청천강이 서로 배편으로 연결될 수 없기에 세종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패강과 살수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8) 『성종실록』 安州城西卽淸川江, 一名薩水。.... 隋 煬帝以十萬之師, 敗於薩水, 卽今淸川江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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