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3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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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와 행촌 이암 박덕규
①단군조선 역년 1908년 ②두 번의 천도(遷都)(평양→백악산→장당경) 58) ③단기 1048년(은 무
정 8년 을미)에 왕조의 체계가 바뀌는 큰 사건이 있었다. 와 같은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908
년 동안 도읍을 두 번 옮겼다는 것은 도읍 천도가 갖는 의미, 국가체제가 크게 변했다는 것을 뜻하
며, 첫 번째 천도는 前조선이 끝나는 단기 1048년으로 짐작되며 이때 평양성에서 백악산으로 옮겼
고, 두 번째 천도는 단기 1908년으로 장당경으로 천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조선을 다스리던
단군은 첫수도였던 평양성(平壤城)으로 돌아갔는데, 『고기』의 첫 도읍지 평양성과 『위서魏書』의
첫 도읍지 아사달은 같은 곳으로 보인다. 따라서, 단군이 아사달로 돌아가 은거한 때는 첫 번째 도
읍을 옮기는 단기 1048년에 발생했다. 이와 같은 합리적인 추론은 「단군세기」에 기록으로써 상세
히 담겨있다. 따라서, 「단군세기」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인용했던 고유 사서의 원형을
충실하게 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려도 전혀 무리가 없다.
5. 단군세기와 태백일사 역사체계의 차이점
고려 말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는 조선 초 이맥이 쓴 「태백일사」와 다른 역사체계를 보여준다.
‘은 무정 8년 을미(단기 1048, BCE 1286)년’에 일어난 22세 색불루단군의 혁명사건을 행촌은
「단군세기」에서 단군조선 정치체제의 변화로 서술하지 않았다. 59) 다만, 44세 구물단군 때는 ‘국
호를 대부여로 바꾸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었다’ 60) 고 기록했다. 반면에, 이맥은 「태백일사」
에서 마한세가와 번한세가를 上, 下로 나누어서 上에 삼한(전조선, 1048년)을, 下에 삼조선(후조
선, 860년)을 구분해서 기록했다. 또한, ‘22세 색불루 단군 때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셨다’고 기록
했다. 이와 같은 삼조선 분립의 시점을 다르게 기술한 이유는 역사체계 인식의 차이 때문이다. 행
촌은 국호를 바꾸고 병권을 분립한 단기 1908년을 삼조선 분립의 시점으로 서술했고, 이맥은 혁
명으로 정통성이 훼손된 단기 1048년을 삼조선 분립의 시점으로 본 것이다.
일견, 서술의 오류로도 보일 수 있지만,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이해가 된다. 행촌의 「단군세기」
를 보고난 뒤에 「태백일사」를 저술했던 이맥의 입장에서는 당시 기자조선을 인정하는 조선시대
역사체계에 영향을 받아서 1048년을 기점으로 전조선(삼한)-후조선(삼조선)의 2조선 체계를 선
택했고, 행촌은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는 『古記』류의 고유 사서에서 서술한 ‘단군 1908년’을
중요시했던 것이 두 사서간에 차이가 생기게 된 이유였다.
58) ‘아사달로 돌아가 은거했다(還隱於阿斯達)’는 구절은 문맥상 이전 도읍지인 평양(아사달)으로 돌아갔다는 뜻으로
보인다.
59) “帝命修築鹿山 改官制(임금께서 녹산의 성을 개축하게 하고 관제를 개혁하셨다)’ (『환단고기』「단군세기」,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원년)
60) “於是 丘勿 爲諸將所推 乃於三月十六日 築壇祭天 遂卽位于藏唐京 改國號大夫餘 改三韓爲三朝鮮(이에 구물이 모든
장수의 추대를 받아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셨다. 구물단군께서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셨다.)” (『환단고기』「단군세기」, 44세 단군 구물 재위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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