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8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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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분과 2


                    위대한 신하 한 사람의 능력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온 나라 사람이 나라

                    구할 것을 스스로 기약하고 나라를 구하는 데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를 찾아낸 연후에 비로소 구
                    국을 말할 수 있으리라.       43)



                   행촌은 정치적 혼란과 삶의 고비에서 천보산으로 청평산으로 은거했다. 『태백진훈』을 저술하고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실현해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강화도로 들어갔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사직을 지키기 위해 강화도로 들어가서 대장경을 만들었던 것처럼,

                 고려의 道, 나라의 근본인 선비의 기개는 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단군조선
                 의 역사 정신이 살아있는 강화도에서 『단군세기』를 저술했다. 이승휴가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삼

                 척 두타산 귀동으로 들어가 용안당에 머물면서 『제왕운기』를 저술                          44) 한 것을 떠오르게 한다.



                 Ⅳ. 『단군세기』의 역사체계




                     1.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사서의 고려시대 저자들



                   『북부여기』를 쓴 복애(伏崖) 범장(范杖)은 범세동(范世東, 생몰 불명)으로 고려 말 학자이며 정몽

                 주의 제자이다. 1369년(공민왕 18년) 문과에 급제하여 간의대부 등을 지냈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화동인물총기  ,   동방연원록  을 저술했고, 원천석과 함께   화해사전  을 썼다. 조선 태
                 종(太宗)이 여러 번 벼슬을 권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45)  『북부여기』에는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范樟)’이라는 이름을 썼다.
                   『삼성기전』下를 쓴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1330년~?)은 고려 말의 은사(隱士)로 범세동과

                 함께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
                 박해 1360년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이방원(李芳遠)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서 이방원
                 이 왕으로 즉위하여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종이 원천석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 속으로 피해버렸다.
                   『진역유기』를 쓴 청평산인 이명(李茗)은 선가(仙家)의 인물로 『청학집』에 소개되어 있다.



                    두류산에서 수도하던 최당·한유한과 같은 차원의 인물로 대세구칠(大世仇柒)의 일파이다. 단

                    (丹)을 연마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과일과 나물을 먹고 화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때때로 깊은 산


                 43) 안경전 역주, 앞의 책, 2012, 84~91쪽.
                 44)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보광정기(葆光亭記)
                 45) [네이버 지식백과] 범세동 [范世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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