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1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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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와 행촌 이암 박덕규
『단군세기』는 기자조선에 대한 언급이 없고 삼한(1048년)과 삼조선(860년)을 거쳐서 대부여
(188년)로 이어졌다고 서술했다. 다만, BCE 232년 기후(箕詡)가 번조선 70세 왕이 되었다는 서술
이 있는데, 기자(箕子)의 성은 은(殷) 왕족과 같은 子씨였기 때문에 기자의 후손으로는 보이지는 않
는다. 50)
(46세 단군 보을) 재위 19년 무술(단기 2011, BCE 323)년 정월에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병사를
이끌고 번조선 궁에 진입하여 스스로 70세 번조선 왕이 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를 청하였다.
임금께서 윤허하시고 연나라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게 하셨다. 51)
『제왕운기』와 『단기고사』는 전·후조선으로 나누어 전조선(단군조선)이 끝나고 기자가 동래하
자 후조선(기자조선)으로 이어졌다고 기록했다. 단군을 이어서 조선을 다스렸다는 기자조선설은
조선 시대 정설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단기고사』의 저자는 조선시대와 근대시기의 역사인식체
계를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3. 고려 초의 역사인식
고려는 이미 국초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편찬하였고, 그 안에 『단군본기(檀君本紀)』가 기재
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52) ‘단군(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체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
인다. 53) 『삼국유사』 왕력(王歷)에서도 고구려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렇게
‘단군—고구려’ 계승의식을 강조하는 사서에는 중간에 기자(箕子)가 들어갈 여지가 없었을 것이
다. 54)
『규원사화』에서 기자조선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단군 역년 1205년 후에 47세 고열가 단군이
아사달로 은거하고 여러 제후들이 다투는 열국시대로 이어졌다고 서술했다.
(47세 고열가) “우리 황조께서 나라를 세워 ... 그런데 이제 황실이 점차 쇠약해지고.. 이에 덕이
있는 사람에게 이 자리를 물려주고자 한다 ... 그러니 내가 당장경(唐莊京)으로 옮겨 아사달에 들
어가 선조들의 신령을 평안히 모시겠다”했다.
모든 가(加)들이 슬퍼하며 따랐다. 임금이 ... 당장경에 피해 살다가 마침내 아사달에 자리 잡았
50) 홍을표, 「기자조선에 대한 문헌적 분석」, 『강원사학』 25(24, 25집 합본), (2011), 59~88쪽.
51) 안경전 역주, 앞의 책, 2012, 149쪽.
52) 한영우, 「고려~조선전기의 기자인식」, 『한국문화』(3), (1982), 19~56쪽; 김정배, 「단군기사와와 관련된 “고기古
記”의 성격」, 『한국 상고사의 제문제諸問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165쪽.
53) 한영우, 앞의 논문, 1982, 25쪽.
54) 조원진, 「기자조선 연구의 성과와 과제」, 『단군학연구』(20), (2009), 395~4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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