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6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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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분과 2
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를 베게 하였다” 70) 라는
기록이 전한다. 71)
이외에도 『조선상고사』에는 『환단고기』에만 기록되어 있는 독자적인 기록과 유사한 서술들이
보이는데 ‘삼조선 분립’과 ‘고구려 900년’, ‘삼신오제를 바탕으로 한 단군조선의 삼한오가제도’,
‘부루태자가 하우에게 전한 황제중경(금간옥첩)’, ‘왕문의 이두법’, ‘단군연대의 고증’ 등이다. 그
런데, 이 역시 큰 틀에서는 같지만 『환단고기』의 기록과 단재의 논증법은 다르다. 예를 들어 「태백
일사」에는 고주몽의 4대조 혈통이 기록되어 있지만, 단재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을 분석하여
고주몽의 선조에 4대가 더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언충의 비기를 근거로 고구려 900년 설을 논
증하였다.
고리군(槀離郡)의 왕 고진(高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는
고진의 손자이다. ...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을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
들어 고주몽을 낳았다. 때는 임인(BCE 79)년 5월 5일이며, 한(漢)나라 왕 불릉弗陵(昭帝) 원봉
(元鳳) 2년이었다. 72)
고구려본기로 보면, 광개토왕은 시조 추모왕의 13세손世孫이 될 뿐이지만, 광개토왕의 비문碑
文에 나오는 “傳之十七世孫, 廣開土境平安好太王.(전지십칠세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17세
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게 전하였다)이라는 구절에 의하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13세
손이 아니라 17세손이니, 이같이 세대를 빠뜨린 본기이므로, 그 705년이라 운운하는 연조도 믿
을 수 없다는 것이.. 73)
또한, 「단군세기」에는 ‘기후가 번조선 70대 왕이 되었다’고 서술되어있는 반면에 74) , 단재는 “이
전의 역사서에서는 단군왕검 1220년 후에 “箕子王朝鮮(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이라고 기재
해 놓았으나, 기자는 그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기원전 323년경에 이르러서 그 자손이 비로
소 ‘불조선’의 왕이 되었으니” 75) 라고 서술하여서 차이가 있다.
70) 안경전 역주, 앞의 책, 2012, 113쪽. (「단군세기」 3세 가륵단군 10년(단기 161, BCE 2173) 기사)
71) 박준형, 김종복. 「『대동역사(大東歷史)(고대사(古代史))』를 통해 본 신채호의 초기 역사학」, 『동방학지』 (162), (20
13), 283~389쪽.
72) 안경전 역주, 앞의 책, 2012, 559쪽.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73) 신채호,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2006), 152~153쪽.
74) “(46세 단군 보을) 재위 19년 무술(BCE 323년)년 정월에 읍차 기후가 병사를 이끌고 번조선 궁에 진입하여 스스로
70세 번조선 왕이 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를 청하였다. 임금께서 윤허하시고 연나라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게 하셨
다.” (「단군세기」)
75) 신채호, 박기봉 옮김, 앞의 책, 2006,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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