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9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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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와 행촌 이암  박덕규



                    속에 들어가 희귀한 약초를 찾고 바위에 앉아 천지자연의 기(氣)를 마셨다. 동료인 최당·한유한

                    과 함께 자취 없이 사라져서 수개월 동안 물외(物外)에 노닐고, 때로는 벗들과 술을 마시며 도를
                    의논하였다. 병자를 만나면 단약(丹藥)을 주어 생명을 구하고, 인재를 만나면 선도의 중요성을

                    설명하였다. 뜰에는 기화요초를 심고 선학을 길렀으며 가시나무로 삽작을 만들었다. 천길의 절
                    벽이라도 힘들이지 않고 올랐으며, 몸은 솜털처럼 가벼웠다고 한다. 지금도 청평산의 골짜기에

                    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46)



                     2.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비교



                   『단군세기』는 단군 47대 2096년의 역사를 서술하는 반면에 『규원사화』는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紀)」, 「단군기(檀君記)」로 나눠서 환인과 환웅은 「조판기」에, 신시씨(환웅)와 치우·고
                 시·신지·복희씨는 「태시기」에 단군 47대 1205년 역사는 「단군기」에 썼다. 따라서,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단군기」를 비교해본다. 먼저, 두 종의 사서가 각각 밝힌 저본이 다르다. 『단군세기』
                 는 초대 단군왕검 기사에 인용된 『古記』 외에는 출처를 밝히지 않았고, 『규원사화』는 『조대기』를

                 바탕으로 40여 권의 사서를 인용했다고 밝혔다.



                    내가 일찍이 국사國史를 써 보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원래 재주가 없고 또 명산 석실에도 깊
                    이 감춰져 있는 것이 없으니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어찌하랴. 그러나 다행히도 산골짜

                    기에서 청평이 쓴   진역유기  중에 삼국 이전의 옛 기록이 있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그것
                    이 간략하고 자세하지는 않으나 항간에 선비들이 구구하게 떠드는데 비하면 오히려 사기士氣

                    가 드높다. 이에 다시 중국 역사에서 전해 내려오는 것들에서 발췌하여 사화史話를 만들게 되
                    니... 47)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단군기」는 모두 소전거사에게 얻은 『조대기』 등 여러 고서                             48) 를 참

                 고한 것으로 보여서 비슷하면서도 차이점이 크다. 요약하면 ①단군조선 역년 ②도읍지와 천도 ③
                 정치제도 ④강역 ⑤세법 등이 다르다.











                 46) 趙汝籍, 『청학집(靑鶴集)』, 「權五虎」
                 47) 북애, 고동영 역,   규원사화  (뿌리, 1986), 8쪽.
                 48) “그곳에 소전素佺이라 하는 거사가 기이한 옛 서적(奇古之書)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范墇)과
                 함께 신서(神書)를 얻었는데..” (안경전 역주, 앞의 책, 2012, 6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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