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5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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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와 행촌 이암 박덕규
고등왕(高登王)은 「단군세기」 21세 소태단군 조에 나오는 인물로 다른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북사(北史)』가 유일한데, 그 내용은 ‘고구려인들이 부여신의 아들로 모신 (고등)왕’으로 되어 있
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 ‘(고등왕은) 대체로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65) 로 되어있어서, 석주 이상
룡이 『북사』를 읽고 고등의 존재를 알았던 것이라면 주몽으로 말했을 것인데 「단군세기」에 나오는
것처럼 분명하게 ‘부여 고등왕’이라고 썼다.
‘숙신은 일명 읍루(挹婁)인데 부여에 신속하여 조세를 바쳤다’고 한다. 소위 부여는 고등왕이 도
읍한 곳이니, 단씨(檀氏)의 신속이 된다는 것은 더욱 확실한 근거가 있다. 따라서 왜국 또한 구이
의 하나임을 생각하면, 똑같이 단군의 속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66)
석주 이상룡이 고등을 두막루 북부여의 왕이라고 말한 이유를 「단군세기」에서 찾으면 ①개사원
욕살 고등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21세 소태단군에게 번한의 우현왕이 되기를 주청하여 두막루(豆
莫婁)로 불렸다. ②부여를 두막루라고도 불렀으며(『북사』) ③두막루는 옛 북부여 67) 이기 때문에,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에서 “부여의 옛 나라는 두막루(豆莫婁)이니, 물길(勿吉) 북쪽 천 리에 있
었다.”는 구절을 읽고 ‘(북)부여 고등왕’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고등왕 천도’라고 한 까닭은 단기 1048년, 21세 소태단군 때 우현왕 고등의 손자 색불루
가 혁명을 일으켜서 스스로 단군에 오르고, 도읍을 백악산으로 옮긴 후에 부여신궁에 할아버지 고
등왕을 모신 사건을 뜻한다. 이렇게 석주 이상룡은 「단군세기」에만 전해지는 기록을 「서사록」에
쓴 것이다. 또한, 고구려를 ‘900년 문화대국’ 68) 으로 말하거나, 단군조선을 ‘진한(辰韓)’으로 말한
것들이 보이는데, 이 또한 「단군세기」의 내용을 알고 있던 것으로 짐작하게 된다.
석주 이상룡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단재 신채호의 『대동역사』에도 『환단고
기』의 내용이 보인다. 단재는 1907년에 쓴 『대동역사』에서 “만국萬國이 솔복(率服)하되 오직
예맥추장(穢貊酋長) 소호무리(素戶茂梨)가 불복(不服)하거늘 팽오(彭吳)를 견(遣)하야 토평
(討平)하고” 69) 라고 하여 ‘단군이 팽오를 보내 예맥 추장 소호무리를 토평했다’는 내용을 썼는
데, 이것은 다른 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단군세기」에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이 반
65)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像, 一曰高登神, 云是其始祖夫餘神之子. 並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朱蒙
云. (신묘가 두군데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여 나무를 조각하여 부인상을 만들었고, 하나는 고등신이라 하여 그들
의 시조이며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모두 관사를 설치해 놓고, 사람을 파견하여 수호하는데, [그 두 神은] 대체로
[주몽의 어머니인] 하백의 딸과 주몽이라고 한다.)” (『北史』 列傳 高句麗)
66) 석주유고(石洲遺稿) 권6 잡저, 「서사록」 2월 22일.
67)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두막루. “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扶餘也”
68)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읽었다. .. 황탄한 말을 허다히 꾸며 냄으로써 900년 문화대국을 느닷없이 일개 작은 선괴
(仙怪)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석주유고 권6 잡저, 「서사록」 2월 26일.)
69) 신채호, 『대동역사(大東歷史)』 제1장 제1절 조국(神祖)의 건국(建國),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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