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7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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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와 행촌 이암 박덕규
「태백일사」에 ‘44세 구물단군이 혁명을 일으키고 삼조선으로 분립하였다’ 76) 는 기록이 있는 반
면에, 단재는 『사기』와 『관자』 등 차이나 사서에 ‘신말불’의 세 조선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고
삼조선이 분립한 시기를 논증했다.
그렇다면 삼‘한’은 어느 시대에 분립하였는가? <사기>에 보이는 진眞·막莫·번蕃 세 조선은 “전
연시全燕時‘, 곧 연(燕)의 전성시대라 하였는데, 연(燕)의 전성시대는 중국 전국戰國 시기의 초
이며, “발조선發朝鮮”이 기록되어 있는 <관자>는 관중이 지은 책이 아니라 전국 시대의 위서이
며, “발숙신發肅愼”이 기록되어 있는 <대대례>는 비록 한인漢人 대승(戴勝)이 쓴 것이기는 하
나, “발숙신發肅愼” 운운하는 것은 제齊 나라 사람 추연(鄒衍)이 전한 것이고, 추연은 전국시대
의 인물이니 신·말·불 세 조선의 명사가 이처럼 중국 전국시대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
으로 보아 삼조선의 분립은 곧 중국 전국시대의 일이며, 중국 전국시대는 기원전 4세기경이니,
그렇다면 기원전 4세기경에 신·말·불 삼조선이 분립한 것이다. 77)
Ⅵ. 결론
「단군세기」의 저자인 행촌 이암이 살았던 고려 말은 원의 지배와 간섭이 극에 달할 때였다. 원의
간섭과 조종으로 임금이 바뀌고 신하들은 유배 되었다. 정치적 혼란속에 강화도에 갇히게 된 행촌
은 유배가 풀리자, 천하유력을 떠나고 천보산으로 은거한다. 그곳에서 일명 ‘천보산 결의’를 통해
도가의 심법서인 『태백진훈』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천보산은 지금의 양주 천보산이 아
니라, 春州(춘천) 淸平山이 ‘천보산’임을 고찰하였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전해지는 ‘천보산 결의’ 즉, 이명, 범장과 함께 소전거사로부터 신
서와 역사의 진결을 얻었던 태소암은 양주 천보산이 아니라, 춘천 청평산에 소재했던 청평사의 여
덟 암자 중에 한 곳으로 추정된다. 청평사는 고려 초 선불사상에 정통했던 이자현이 문수원으로
중창한 이래 고려 선가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해동전도록』에서 조선 도학의 맥을 잇
는 인물로 청평산인 이명이 나오는 점, 이자현의 희이(希夷) 사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삼교회통 사
상을 가진 원천석이 청평사에 들러 시를 남긴 점, 김시습이 청평산에 은거했던 점, 여덟 암자의 이
름이 선도의 수행과정과 완성을 뜻한다는 점 등 여러 정황상 청평산의 옛 이름이 천보산이고 청평
사의 암자 중에 한 곳에 행촌이 은거하면서 태소암으로 이름 붙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청평산에 은거하고 있던 이암은 이후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수문하시중에 오르지만, 다시 은퇴
하고, 말년의 이암이 찾은 곳은 고려의 자주정신을 상징하는 강화도였다. 일찍이, 천보산에서 도
학의 심법서 『태백진훈』을 쓰고 강화도에서 단군의 역사를 밝히는 『단군세기』를 쓴 것은 격변의
76) “구물단군께서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셨다.” (「단군세기」)
77) 신채호, 박기봉 옮김, 앞의 책, 2006,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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