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7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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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와 행촌 이암 박덕규
는 것이 통설이었다. 하지만, 강화도의 역사적 의미에서 보면 국조 단군에게 의지해서 배수의 진을
쳤다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40) 강화도 천도파의 일부는 강화도 유적을 단군과 연결지음으
로써 강화 천도의 당위성을 선전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41)
4. 행촌 이암과 강화도
벼슬을 버리고 물러난 만년의 이암이 찾아간 곳도 강화도였다.
공은 관청에서 공무를 처리할 적에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자세로 법도를 준수하면서 털끝만큼이
라도 사정을 봐주는 일이 있지 않았고, 집에서 지낼 적에는 살림살이를 전혀 묻지 않은 채 오로
지 圖書로 시간을 보내면서 담담하게 혼자 즐길 뿐이었다. 그리고 禪源寺의 息影 노인과 方外의
우정을 나누면서, 사원 경내에다 집을 짓고 海雲이라는 편액을 내건 뒤에 조각배를 타고서 왕래
하곤 하였는데, 한번 가면 번번이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 高雅한 흥치가 대개 이와 같았으며, 杏
村은 바로 공의 自號였다. 42)
「연보」와 『단군세기』序에 따르면 1363년 10월 3일, 이암의 나이 67세에 강화도 선행리(仙杏里)
홍행촌(紅杏村) 해운당(海雲堂)에서 서문을 쓰고 『단군세기』를 완성했다. 이암은 『단군세기』 序에
『단군세기』를 쓰는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나라를 위하는 길에는 선비의 기개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사학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사학이 분명하지 못하면 선비의 기개를 진작시킬 수 없고, 선비의 기개가 진작되지
못하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갈라지기 때문이다.
아, 슬프구나! 부여에 부여의 도道가 없어진 후에 한漢나라 사람이 부여에 쳐들어왔고, 고려에
고려의 도가 없어진 후에 몽골이 고려에 쳐들어왔다. 만약 그 전에 부여에 부여의 도가 있었다면
한나라 사람은 한나라로 쫓겨 가고, 고려에 고려의 도가 있었다면 몽골인은 몽골로 쫓겨 갔을 것
이다.
금일에 외인(몽골인)들이 정사를 간섭함이 갈수록 심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고 다시 오름을 저희
들 멋대로 조종하되, 우리 대신들이 속수무책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라에 역사가 없고, 형체
가 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40) 복기대, 앞의 논문.
41) 인하대 사학과 서영대, 브레인 미디어와의 인터뷰중에서(2016.12.30.)
http://www.brainmedia.co.kr/brainWorldMedia/ContentView.aspx?contIdx=19078
42) 이색, 『목은고(牧隱藁)』권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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