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5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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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와 행촌 이암 박덕규
3. 고려시대 강화도가 갖는 의미
고려의 단군에 대한 역사 인식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일화가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서 모신
초례다. 단군을 국조로 모신 참성단에서의 초례는 1264년(원종 5) 원종의 친제(親祭)가 거행된 이
후 매년 봄가을로 설행되었다. 33)
원종이 참성단에서 친제를 거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원종 5년(1264) 5월, 원종은 몽고로부터
친조(親朝)하라는 명령을 받는데 원종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래서 친조 시기의 연기를 요청
하는 한편, 각종 법회를 개최하여 이를 피하고자 했다. 이때 풍수를 업으로 하는 백승현이 참성단
초제를 올릴 것을 집정 무인이었던 김준을 통해 아뢴다. 34)
원종(元宗) 5년(1264)에 왕이 친히 입조(入朝)할 것을 몽골이 요구하자, 백승현이 또한 김준(金
俊)을 통해 아뢰기를, “마리산(摩利山)의 참성(塹城)에서 친히 초제(醮祭)를 지내시고 또한 삼
랑성과 신니동에 가궐을 만드셔서 친히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을 여시면 8월이 되기
도 전에 반드시 응답이 있어 친조(親朝)를 중지시키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삼한(三韓)이
변하여 진단(震旦)이 됨으로써 대국(大國)이 와서 조공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믿고 백승현과 내시(內侍)인 대장군(大將軍) 조문주(趙文柱)·국자좨주(國子祭酒) 김구(金坵)·
장군(將軍) 송송례(宋松禮) 등에게 명하여 가궐을 만들도록 하였다. 35)
몽고 침입기에 고려의 풍수도참가들은 국조(國祚) 연장 내지 국난 극복의 장소로 단군과 관련되
는 곳을 지목했다. 36) 특히, 개경과 가까운 강화도 참성단은 고려 이전부터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
던 곳 37) 으로, 고려 말기 몽고의 침략과 지배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고 단군을 국조로 하여 고려
가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했다는 자주 역사의식의 상징이 강화도 참성단이었다.
고려 지식인들의 심층에 이런 역사인식이 있었다는 것은 행촌을 스승이자 선배로서 존경했던
이색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색은 ‘고려 역사의 출발이 당요 무진년에서 삼국을 거쳐 고려
에 이르렀고, 태조의 수명(受命)이후 400여년이 되었음’을 밝히는 주관육익(周官六翼) 의 서문과
“조선씨(朝鮮氏)가 나라를 세운 것은 실로 당요 무진년의 일이었는데, 대대로 중국과 교류를 하긴
했지만 중국에서 일찍이 신하로 대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주 무왕이 은나라 태사 기자를 조선에
33) 김성환, 「1358년(공민왕 7) 李穡의 摩尼山 紀行과 塹城壇 醮禮」, 『역사민속학』(42), (2013), 7~35쪽.
34) 서영대, 「강화도의 참성단에 대하여」, 『한국사론』42(0), (1999), 205~239쪽.
35) “元宗五年, 蒙古徵王入朝, 勝賢又因金俊, 秦曰, “若於摩利山塹城, 親醮, 又於三郞城神泥洞, 造假闕, 親設大佛頂五星
道場, 則未八月, 必有應, 而可寢親朝. 三韓變爲震旦, 大國來朝矣.” 王信之, 命勝賢及內侍大將軍趙文柱·國子祭酒金坵·將
軍宋松禮等, 刱假闕.” (『고려사』 卷一百二十三 列傳 卷第三十六)
36) 서영대, 앞의 논문, 1999, 205~239쪽.
37) 복기대, 「강화도 참성단의 역사적 이해를 위한 시론」, 『고조선 연구』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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