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4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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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분과 2
삼가 국사(國史)에 의거하고, 각각의 본기(本紀)와 『수이전(殊異傳)』에 실린 것을 널리 채록하
였으며, 여러 요순(堯舜) 이래의 경(經)·전(傳)·자(子)·사(史)를 참고하였으니, 헛된 말을 제거
하고 올바르고 이치에 맞는 말을 취하면서도 그 사적을 펴고 노래하여 〈나라가〉 흥하고 망한 연
대를 밝혔으니 모두 1,460언(言)이다. 28)
시라(尸羅)와 고례(高禮)가 있었으며, 남북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이 이어졌도다. 이와 같은
여러 임금들은 누구의 후손이겠는가? 세계(世系)로는 또한 단군으로부터 이어졌도다. 29)
단군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주석에도 보이기 때문에 30) 적어도 12세기 이전 고려에서는
단군조선에 대한 인식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31)
2. 강화도
1359년, 홍건적이 침략해 들어오자 행촌은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나
아갔다. 32) 1362년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고 안동으로 피신했던 공민왕이 환도한 다음 해, 행촌은
67세의 나이로 은퇴해서 강화도 해운당으로 들어갔다. 그해 겨울 『단군세기』 저술을 완결하고 10
월 3일 서문을 쓴 뒤에 일곱 달이 지난 이듬해 1363년 5월에 행촌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행촌은
왜 은퇴를 한 뒤에 청평산이 아니라 강화도로 떠났던 것일까?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를 저술한 시기의 고려는 원의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공민왕이 반
원 자주 개혁정치를 펼칠 때였다. 친원 세력의 우두머리인 기철을 제거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
여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다. 또한, 원나라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관직 명칭도 원래
대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개혁을 반대하는 권문세족과 홍건적의 침입으로 대내외 혼란이 가중되
어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고려 말 혼란한 격변의 시기에 수문하시중까지 올랐던 이암은 공
민왕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고 자주국 고려를 다시 세워야 하는 때였다.
28) “謹據國史, 旁採各本紀與夫殊異傳所載, 㕘諸堯舜已來經傳子史, 去浮辭, 取正理, 張其事而詠之, 以明興亡年代, 凡一
千四百六十言.”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卷下))
29) “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 皆檀君之壽也.”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卷下))
30)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第五 東川王)
31) 이도학, 「단군(檀君) 국조(國祖) 의식(意識)과 경역(境域) 인식(認識)의 변천(變遷) -『구삼국사(舊三國史)』와 관련하
여-」, 『한국사상사학』40, (2012), 377~410쪽.
32) “庚午 以守門下侍中李嵒爲西北面都元帥” (『고려사』 列傳 卷第二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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